2011년 7월 20일 수요일

중국의 얼후(二胡)와 천익창의 얼금(개량 해금)

문화는 사랑하는 사람의 것이고 사랑받는 곳에 있어야 한다.


버리는자, 줍는자, 버리는 자는 주인임을 포기하는 것이고 줍는자는 새 주인이 되기를 희망 하는 자이다. 한복은 위험한 옷이라 출입을 금지당하고, 만들어 입는자는 이방인, 별종취급 당하고 수백개가 넘는 TV채널 어디에도 씨름하는 것을 볼 수 없다.


수십년간 연구한 개량 전통악기는 대회에서 어린 소녀들의 모방하는 서양문화에 떠밀리고, 이것이 한국문화의 현실이라면 버려지는 문화 스스로 주인임을 포기하는 문화라 아니 할수 없다.


내가 버린 물건 다른 사람은 주어서 쓰지 말라고 할수 없으니, 씨름이든 가야금이든 아리랑이든 내가 버린물건 주인행세는 정당하다 주장 할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내가 버린물건 소각장에서 흔적없이 사라진는것 보다 어리석게도 남이 쓰든물것 가져다 애지중지 한다면 그것 그렇게 나무랄 일인가,


최근 중국이 한반도 문화를 통채로 삼킨데도 조용한 것은 아마도 이런 이유에서 크게 할말이 없는듯 하다.



뱀의 가죽을 벗겨 만든 중국의 대표 악기 얼후(二胡) 뱀가죽외 대안 책은 없는가?


누군가 필자(천익창) 잡아다가 가죽을 벗겨 그 가죽으로 악기를 만들어 소리를 낸다면 그소리가 천익창 노래 소리일까 천익창의 울음 소리일까?....


우리는 막연히 들려오는 소리에 무감각하다,


세계에서 4번째로 큰나라, 13억 이상의 인구, 중국


중국인 대부분이 얼후(二胡)의 음악을 좋아한다, 그들중 얼후가 왜 하필 뱀의 가죽을 사용한 악기여야만 하는지 생각해 보았는지...


필자는 거의 평생악기와 음악을 연구해 왔다, 오늘 중국의 얼후(二胡)를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최근 중국이 한반도 문화에 관심을 갖고 사랑이 지나쳐 한반도 문화 모두 중국것이라고 등록하였다고 하니 필자도 중국을 사랑하는 마음에 중국의 대표 악기 얼후(二胡)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인간이 사용하고 있는 악기중 유독 얼후만이 동물의 가죽을 사용한 것은 아니지만 그 모양과 음색이 유독 선명하여 인간의 잔인성과 뱀의 가죽에서 품어내는 음색이 소름돗게 한다.


필자는 고대악기를 연구하며 오랜옛날 인간은 문명이 시작 되기전(구석기) 잡아먹은 동물들의 뼈를 통해 소리(뼈피리)를 냄으로 관악기의 시작은 뼈에서 부터 진화된 것이라고 여러차례 발표한 일이 있다.


지금은 21세기 피아노를 치며 즐거워하는 강아지, 고양이들을 보며 살아가는 시대, 자연과 더불어 공존하여야 하는시대 언제까지 뱀의 울음소리를 노래소리로 착각하고 살아야 하는가?


동물 가죽의 울음소릴 언제까지 즐겨하여야 하는가?


뱀가죽이 아닌 얼후의 변화를 촉구 한다. 또한 모든 동물을 재료로 사용하는 악기들은 다른 대채소재를 찾길 촉구 한다.




필자(천익창)의 얼금(개량 해금)은 2008년 아들의 군입대후 적막감에 빠져 있을 시기 무료함을 달례기 위해 만든 악기이며, 이번 기회에 얼후와 함께 소개한다








얼후(二胡)의 전면




얼후(二胡) 조율기 부분(개량된 형태)




얼후(二胡) 뱀의 가죽을 벗겨 만들어진 울림통



천익창의 얼금(개량 해금)

천익창의 개량해금은 2008년 아들의 군입대후 적막감에 빠져 있을 시기 무료함을 달례기 위해 만든 악기이며, 천익창 개량해금의 특징이라면 기존에 사용된 재료가 아닌 현대 첨단의 제질이 선택구성된 3옥타브 이상의 음역과 맑은 음색이 특징이며, 연주법은 기존의 주법과는 다른 천익창 개량가야금(창금) 활주법이 응용되어 섬세한 표현이 가능하며 장르에 제한 없이 연주할 수 있게 된 것이 특징이다.

또한 환경(장소)과 기후에 간섭받지 않는 특징이 있다.



천익창의 얼금(개량해금)




유튜브에서 천익창이 만든 얼금(개량해금)연주로 민요를 포함한 각종음악 듣기:
http://www.youtube.com/results?search_query=%EC%B2%9C%EC%9D%B5%EC%B0%BD%EC%9D%98+%EC%96%BC%EA%B8%88&aq=f



■ 천익창 경력및 활동
http://iboard2.superboard.com/board.cgi?db=28_dwhyc53noti251&idx=8&page=8


유튜브에 개설된 천익창의 동영상 사이트
http://www.youtube.com/hyc53#p/u
http://www.youtube.com/hyc53?gl=KR&hl=ko#g/u

천익창( Ikchang Cheon) 010-8790-7776,
E-mail: hyc53@dreamwiz.com

2011년 7월 17일 일요일

천익창의 한반도 구석기 유적지 답사(3) 작은용굴

천익창의 한반도 구석기 유적지 답사(3) 작은용굴







최근(2011. 6. 23) 뉴스에 따르면, 씨름도 중국것, 가야금도 중국것, 아리랑도 중국것, 어떤자가 말하길 아리랑은 밀양에도 있고 진도에도 있단다. 그러니 확대 해석하지 말라고, ...



독도가 일본 땅인들 무엇이 문제냐?. 울릉도도 있고, 제주도도 있는것을,..



어찌 권력자들이 가지고 있는 여유로움이 이것뿐이냐,



우리나라 역사서 삼국사기에 "가야금은 6세기 가야국에 가실왕이 당나라 쟁을 보고 본떠 만들었다" 는 기록이 있다,



필자(천익창)는 평생을 음악 특히 가야금을 연구하면서 개량도 하고 복원도 하면서 6세기 이전 시기에 이미 한반도에는 악기를 사용한 흔적을 발견하고 여러시기에 사용된 여러악기들을 복원 발표하였다.



그중 필자는 2004년 1500년전 신라의 금(신라시대 신라금)을 복원하고, 발표하기 위해 문화재 보호재단과 국립국악원에 수차례 공연신청을 하고 거절당하고, 법정투쟁(행정소송)까지 벌렸으나 허락 받지 못하였으며, 그들은 역으로 날조 조작된 기원전 현악기라며, 광주 신창동 유물를 2005년부터 최근(국립중앙박물관 2011.5.10 ~ 6. 26)까지 지속적이고도 집요하게 날조 조작을 감행해 왔다.



관련자료 바로보기:

http://kr.blog.yahoo.com/ehyc53/1139.html





중국의 한반도 문화 중국것으로 만드는 일(동북공정)은 중국에 거주하는 조선족중국인을 기반으로 계획된 일을 순서대로 진행할 것이며, 아직 한국의 국립국악원의 많은 중국문화 잔류들을 문제삼지 않은 것은 자신(중국인)들이 많은 비용드리지 않고 잘보존하니 언젠가 힘들이지 않고 한입에 삼킬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한국의 문화재 보호의 책임자들, 그들의 대처 능력없고 황당한 여유로움과 당치않은 날조 조작에 감복한다.



나라가 통체로 넘어가도(한일합방 일제시대) 조선인이 전멸되지 않는다면 문제될게 없다고 할 것이니 보잘것 없는 개인이 가슴을 친들 무엇이 달라 지겠는가,





각설하고, 우리의 것이지만 우리의 관심 밖에 멀리있는 한반도 구석기 유적지 우리 땅에 박혀 있어 누구도 퍼갈수 없는 것이니 빼앗길 염려는 없는 것이지만, 지구상 세계 어디에도 똑 같은 것이 없는 유일한 자신의 것을 잘 지키고 가꾸어야 함에도 스스로 파괴하고 훼손한 우리의 손이 밉고 화난다.



그동안 필자(천익창)는 여러해 동안 현지를 조사하고 기록한 형상들이 가슴을 아프게해 나누어보고 함께 고민해 보길 권유하며, 이미 파괴되어 사라진 현장들은 복구가 불가능한 것이라 필자(천익창)는 현장의 이미지를 머리속에 상상으로 구성하고 조립하여 도자기로 구우며 스스로 위로하고 있다.



자 우리땅에 있는 인류의 흔적 한반도 구석기 유적지로 함께 떠나 봅시다.





천익창의 한반도 구석기 유적지 답사 작은용굴




인간의 출입을 확인할수 있게한 자연적 통로가 형성된 길다란 출입구와 곡선으로 다듬어진 바위굴 입구



언제 만들어진 것인지 훼손되어 내용을 잘 확인 할수 없는 안내 표지판





굴 입구쪽에서 바깥쪽을 본 모습 벽면에 전기 스윗지가 있으나 고장이 나 굴을 밝힐수 없었다.





입구 쪽에서 굴 안쪽을 본 모습





후레시를 사용 촬영한 굴의 벽면은 온갖 낙서로 가득하여 어느것이 옛것인지 분간이 어렵다.(1)




후레시를 사용 촬영한 굴의 벽면은 온갖 낙서로 가득하여 어느것이 옛것인지 분간이 어렵다.(2)







굴의 천정에서 빛이 들어 오는 것을 확인 할수 있었고, 그 빛은 굴 속의 공간을 어느정도 밝게 하여 구석기 한반도 인류가 주거 환경으로 충분히 사용 될수 있었음을 확신할수 있었다(1 )(후레시를 사용하지 않고 촬영하여 형상이 흔들림)





입구 쪽에서 후레쉬를 사용하지 않고 촬영한 사진, 천정의 빛으로 하여 그 빛은 굴 속의 공간을 어느정도 밝게 하여 구석기 한반도 인류가 주거 환경으로 충분히 사용 될수 있었음을 확신할수 있었다(2)(후레시를 사용하지 않고 촬영하여 형상이 흔들림)







주변에는 폐쇄하고 방치한 구석기 인류가 사용한 흔적이 분명한 다듬어진 곡선형 굴 입구가 보인다.





작은 용굴 주변 풍경. 굴입구에서 20~30m 왕복 2차선 도로, 멀리 팻말이 보인다.





팻말 가까이 다가 가니 먼듯 가까운 대청호가 보인다.






깔끔하고 선명하게 제작된 회차로 안내판 " 일반차량은 청남대에 들어갈 수 없으니 2km앞에서 회차해 주세요" 가 있다 팻말로 보건데 2km 전방에 일반인은 출입할 수 없는 청남대가 있는듯 하다.



이미 훼손되어 사라진 현장들은 복구가 불가능한 것이라 필자(천익창)는 현장의 이미지를 머리속에 상상으로 구성하고 조립하여 도자기로 구우며 스스로 위로하고 있다.





천익창의 도자기 유튜브에서 보기:

http://www.youtube.com/results?search_query=%EC%B2%9C%EC%9D%B5%EC%B0%BD+%EB%8F%84%EC%9E%90%EA%B8%B0







■ 천익창 경력및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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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에 개설된 천익창의 동영상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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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익창( Ikchang Cheon) 010-8790-7776,
E-mail: hyc53@dreamwiz.com

천익창의 한반도 구석기 유적지 답사(2) 두루봉동굴유적

천익창의 한반도 구석기 유적지 답사(2) 두루봉동굴유적





최근(2011. 6. 23) 뉴스에 따르면, 씨름도 중국것, 가야금도 중국것, 아리랑도 중국것, 어떤자가 말하길 아리랑은 밀양에도 있고 진도에도 있단다. 그러니 확대 해석하지 말라고, ...



독도가 일본 땅인들 무엇이 문제냐?. 울릉도도 있고, 제주도도 있는것을,..



어찌 권력자들이 가지고 있는 여유로움이 이것뿐이냐,



우리나라 역사서 삼국사기에 "가야금은 6세기 가야국에 가실왕이 당나라 쟁을 보고 본떠 만들었다" 는 기록이 있다,



필자(천익창)는 평생을 음악 특히 가야금을 연구하면서 개량도 하고 복원도 하면서 6세기 이전 시기에 이미 한반도에는 악기를 사용한 흔적을 발견하고 여러시기에 사용된 여러악기들을 복원 발표하였다.



그중 필자는 2004년 1500년전 신라의 금(신라시대 신라금)을 복원하고, 발표하기 위해 문화재 보호재단과 국립국악원에 수차례 공연신청을 하고 거절당하고, 법정투쟁(행정소송)까지 벌렸으나 허락 받지 못하였으며, 그들은 역으로 날조 조작된 기원전 현악기라며, 광주 신창동 유물를 2005년부터 최근(국립중앙박물관 2011.5.10 ~ 6. 26)까지 지속적이고도 집요하게 날조 조작을 감행해 왔다.



관련자료 바로보기:

http://kr.blog.yahoo.com/ehyc53/1139.html



중국의 한반도 문화 중국것으로 만드는 일(동북공정)은 중국에 거주하는 조선족중국인을 기반으로 계획된 일을 순서대로 진행할 것이며, 아직 한국의 국립국악원의 많은 중국문화 잔류들을 문제삼지 않은 것은 자신(중국인)들이 많은 비용드리지 않고 잘 보존하니 언젠가 힘들이지 않고 한입에 삼킬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한국의 문화재 보호의 책임자들, 그들의 대처 능력없고 황당한 여유로움과 당치않은 날조 조작에 감복한다.



나라가 통체로 넘어가도(한일합방 일제시대) 조선인이 전멸되지 않는다면 문제될게 없다고 할 것이니 보잘것 없는 개인이 가슴을 친들 무엇이 달라 지겠는가,





각설하고, 우리의 것이지만 우리의 관심 밖에 멀리있는 한반도 구석기 유적지 우리 땅에 박혀 있어 누구도 퍼갈수 없는 것이니 빼앗길 염려는 없는 것이지만, 지구상 세계 어디에도 똑 같은 것이 없는 유일한 자신의 것을 잘 지키고 가꾸어야 함에도 스스로 파괴하고, 훼손한 우리의 손이 밉고 화난다.



그동안 필자(천익창)는 여러해 동안 현지를 조사하고 기록한 형상들이 가슴을 아프게해 나누어보고 함께 고민해 보길 권유하며, 이미 파괴되어 사라진 현장들은 복구가 불가능한 것이라 필자(천익창)는 현장의 이미지를 머리속에 상상으로 구성하고 조립하여 도자기로 구우며 스스로 위로하고 있다.



자 우리땅에 있는 인류의 흔적 한반도 구석기 유적지로 함께 떠나 봅시다.




천익창의 한반도 구석기 유적지 답사 두루봉동굴유적



청원 두루봉 동굴 유적은 1976년 7월 석회암 채취를 위한 발파작업 중 발견된 것으로 10차례(1976~1983년)의 발굴 조사가 이루어 졌다. 유적은 2굴, 9굴, 16굴, 새굴, 처녀굴, 흥수굴 등 여러 갈래의 굴로 이루어졌으며, 집자리와 불땐자리 등의 유구와 완전한 사람뼈, 뼈연모, 다양한 석기 46종의 동물화석, 예술품, 치레걸이 및 나비날개 비늘, 꽃가루 화석 등 풍부한 고고학 자료가 출토되었다.



우리에게 흥수아이로 알려진 흥수굴에서 완전한 어린이뼈 2개체분이 발굴되었는데 1호는 완전한 개체로 5~6살이며, 2호는 그 보다 약간 어리다.



2굴에서 쌍코뿔이, 크로쿠타, 하이에나, 큰원숭이 등의 멸종된 짐승이 발굴 되었다. 새굴에서는 옛코끼리 상아(길이 61.8cm. 지름 7.6cm)가 발굴되었으며, 처녀굴에서는 쌍코뿔이의 아래턱과 완전한 한 개체의 동굴곰 뼈가 사슴뿔을 가운데 두고 나란히 동쪽을 향하도록 놓여 있기도 하였다 이러한 발굴 유물을 통해 먼 과거 한반도는 아프리카와 같은 환경이 였음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흥수굴에서는 주먹도끼, 사냥돌, 찌르게 등 다양한 석기가 출토되어 당시 생활상 복원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15굴 집자리는 계절적으로 사냥활동을 위하여 이용하던 사냥용 임시 주거 유적의 성격을 지닌다.



두루봉 동굴유적은 풍부하고 다양한 고고학 자료가 찾아져 우리나라의 구석기문화를 이해하는데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한반도 구석기 대표유적지 두루봉동굴유적지(충북 청원군 문의면 노현리 두루동)필자가 방문했을때 겨울이라 철조망이 처진 높은 울타리에 어지럽게 각종 팻말이 걸려있다.





각종 경고문, 위험표시, 접근금지, 출입금지, 표지판







필자는 각종 경고문에도 불구하고 철조망에 바짝붙어 내부를 들려다보니 마치 인공호수처럼 인공호가 보였으며,







좀더 자세히 보기위해 철조망 속에서 본 모습은 방치되어 버려진 녹슨 드럼통과 폐광이되어 깊이를 알수 없는 거대한 호수, 이곳이 한반도 구석기 대표유적지 라니 ...







아마도 광산으로 채광이 되지 않고 원형이 보존 되었다면 능선에 보이는 석회암 바위들이 기암 괴석을 이루며 호수로 보이는 저 아래쪽으로 장관을 이루는 세계 몇안되는 구석기 유적으로 그 자태를 뽐낼수 있었을 것이다.









폐광으로 폐쇄되어 인공호수로 변해버린 유적지 아래쪽엔 지금도 채광중인 석회암 광산(구석기 유적지)에는 멀고 깊은 곳에 장난감 같은 컨테이너와 집프차가 입구에 있는것으로 보아 현재 작업중에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대형 석재 차가 출입할 수 있는 경사진 도로가 보인다. 필자가 이곳에 있는 동안 수시로 초대형 석재 운반 차들이 출입 하였다.







탄광의 입구에는 경고문이 보이고 차단 막이 세워져 있다.





경고문, 관계자의 허가 없이 절대 출입 금지 경고문이 서 있다.





위에서 보는 현장의 사진들 여기에 보이는 어느 곳에도 한반도 구석기 유적지인 것을 설명한 것이 없다,



이곳이 우리나라의 구석기문화를 이해하는데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중요한 유적 두루봉 동굴유적이다.......



이미 파괴되어 사라진 현장들은 복구가 불가능한 것이라 필자(천익창)는 현장의 이미지를 머리속에 상상으로 구성하고 조립하여 도자기로 구우며 스스로 위로하고 있다.





천익창의 도자기 유튜브에서 보기:

http://www.youtube.com/results?search_query=%EC%B2%9C%EC%9D%B5%EC%B0%BD+%EB%8F%84%EC%9E%90%EA%B8%B0







■ 천익창 경력및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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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에 개설된 천익창의 동영상 사이트

http://www.youtube.com/hyc53#p/u

http://www.youtube.com/hyc53?gl=KR&hl=ko#g/u



천익창( Ikchang Cheon) 010-8790-7776,
E-mail: hyc53@dreamwiz.com

천익창의 한반도 구석기 유적지 답사(1) 고수동굴, 금굴

천익창의 한반도 구석기 유적지 답사(1) 고수동굴, 금굴





최근(2011. 6. 23) 뉴스에 따르면, 씨름도 중국것, 가야금도 중국것, 아리랑도 중국것, 어떤자가 말하길 아리랑은 밀양에도 있고 진도에도 있단다. 그러니 확대 해석하지 말라고, ...



독도가 일본 땅인들 무엇이 문제냐?. 울릉도도 있고, 제주도도 있는것을,..



어찌 권력자들이 가지고 있는 여유로움이 이것뿐이냐,



우리나라 역사서 삼국사기에 "가야금은 6세기 가야국에 가실왕이 당나라 쟁을 보고 본떠 만들었다" 는 기록이 있다,



필자(천익창)는 평생을 음악 특히 가야금을 연구하면서 개량도 하고 복원도 하면서 6세기 이전 시기에 이미 한반도에는 악기를 사용한 흔적을 발견하고 여러시기에 사용된 여러악기들을 복원 발표하였다.



그중 필자는 2004년 1500년전 신라의 금(신라시대 신라금)을 복원하고, 발표하기 위해 문화재 보호재단과 국립국악원에 수차례 공연신청을 하고 거절당하고, 법정투쟁(행정소송)까지 벌렸으나 허락 받지 못하였으며, 그들은 역으로 날조 조작된 기원전 현악기라며, 광주 신창동 유물를 2005년부터 최근(국립중앙박물관 2011.5.10 ~ 6. 26)까지 지속적이고도 집요하게 날조 조작을 감행해 왔다.



관련자료 바로보기:

http://kr.blog.yahoo.com/ehyc53/1139.html





중국의 한반도 문화 중국것으로 만드는 일(동북공정)은 중국에 거주하는 조선족중국인을 기반으로 계획된 일을 순서대로 진행할 것이며, 아직 한국의 국립국악원의 많은 중국문화 잔류들을 문제삼지 않은 것은 자신(중국인)들이 많은 비용드리지 않고 잘보존하니 언젠가 힘들이지 않고 한입에 삼킬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한국의 문화재 보호의 책임자들, 그들의 대처 능력없고 황당한 여유로움과 당치않은 날조 조작에 감복한다.



나라가 통체로 넘어가도(한일합방 일제시대) 조선인이 전멸되지 않는다면 문제될게 없다고 할 것이니 보잘것 없는 개인이 가슴을 친들 무엇이 달라 지겠는가,





각설하고, 우리의 것이지만 우리의 관심 밖에 멀리있는 한반도 구석기 유적지 우리 땅에 박혀 있어 누구도 퍼갈수 없는 것이니 빼앗길 염려는 없는 것이지만, 지구상 세계 어디에도 똑 같은 것이 없는 유일한 자신의 것을 잘 지키고 가꾸어야 함에도 스스로 파괴하고, 훼손한 우리의 손이 밉고 화난다.



그동안 필자(천익창)는 여러해 동안 현지를 조사하고 기록한 형상들이 가슴을 아프게해 나누어보고 함께 고민해 보길 권유하며, 이미 파괴되어 사라진 현장들은 복구가 불가능한 것이라 필자(천익창)는 현장의 이미지를 머리속에 상상으로 구성하고 조립하여 도자기로 구우며 스스로 위로하고 있다.



자 우리땅에 있는 인류의 흔적 한반도 구석기 유적지로 함께 떠나 봅시다.



천익창의 한반도 구석기 유적지 답사 고수동굴, 금굴




고수 동굴 입구, 필자는 고수동굴을 방문하기전 몇일동안 강원도 태백에 용연동굴, 정선에 화암동굴을 방문하고 이미 지칠대로 지쳐 동굴 탐사를 포기하고 제천까지 돌아오든중 불현듯 스치는 포기하면 않됀다는 생각에 방향을 틀어 고수동굴을 방문하게 되었다, 동굴개방 1시간 전에 도착하여, 한참을 기다린후 방문하게된 고수동굴.





입구의 안내판





입구에서 약 88보(필자보폭) 쯤에 팻말과 화석







동물뼈화석 팻말, 고수 동굴은 필자(천익창)가 인터뷰한 엄경섭 탐험대장의 말에 따르면 1973년 탐사 하였다함.






투명관 속에 보존된 동물뼈화석



수양개 선사유물 박물관 동물뼈화석 특히 사슴뼈 화석이 많았음.




금굴 유적지에서 발굴된 사슴뼈, 필자는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은 모습으로 복원하여 이 사슴뼈는 소리내는 도구(사슴뼈 피리)였음을 확인함.



천익창 한반도 구석기 사슴뼈 피리복원 관련자료 유튜브에서 보기:

http://www.youtube.com/results?search_query=%EC%B2%9C%EC%9D%B5%EC%B0%BD+%EC%82%AC%EC%8A%B4%EB%BC%88%ED%94%BC%EB%A6%AC







사슴뼈 피리가 발굴된 금굴 유적지 전경 (1)





사슴뼈 피리가 발굴된 금굴 유적지 (2)







사슴뼈 피리가 발굴된 금굴 유적지(3), 왼편에 공사를 하고 있다.






사슴뼈 피리가 발굴된 금굴 유적지(4), 왼편에 다리공사를 하고 있어 유적지가 훼손되고 있음을 알수 있다.







천익창 복원 발표(유튜브 발표, 2010. 8. 28)한 사슴뼈 피리.





이미 파괴되어 사라진 현장들은 복구가 불가능한 것이라 필자(천익창)는 현장의 이미지를 머리속에 상상으로 구성하고 조립하여 도자기로 구우며 스스로 위로하고 있다.





천익창의 도자기 유튜브에서 보기:

http://www.youtube.com/results?search_query=%EC%B2%9C%EC%9D%B5%EC%B0%BD+%EB%8F%84%EC%9E%90%EA%B8%B0







■ 천익창 경력및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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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에 개설된 천익창의 동영상 사이트

http://www.youtube.com/hyc53#p/u

http://www.youtube.com/hyc53?gl=KR&hl=ko#g/u



천익창( Ikchang Cheon) 010-8790-7776,
E-mail: hyc53@dreamwiz.com

2011년 6월 8일 수요일

개량 가야금을 열손가락으로 연주하는 선구자 천익창 인터뷰

2011, 5월 조모기자의 13개 서면질문(E-mail)에 대한 천익창의 서면답변(E-mail)



개량 가야금을 열손가락으로 연주하는 선구자 천익창씨(남. 61세)

세 손가락으로 연주를 하는 가야금을 두 대, 혹은 세 대의 가야금을 같이 놓고 열 손가락으로 자유자재 연주하고 또한 그의 개량 가야금중 창금은 연주 가능한 곡이 1천여곡이나 되어 현대판 우륵이라 불린다.


역사적 가치가 있는 고대악기를 복원하고 연주하여 , 없어진 유물을 재현하는 일도 하고 있는 그의 끊임 없는 도전은 계속된다.


1. 한국 최고에 도전하신 분야는 어떤 분야이고 구체적인 내용은?

우리나라 전통 가야금은 원래 열두 줄이다. 그리고 연주할 때는 기본적으로 오른손의 세 개의 손가락으로 연주를 한다. 왼손은 ‘농현’이라 하여 바이브레이션을 주는 기능을 한다. 그런데 나와 나의 아이는 열 손가락으로 서로 다른 재질과 음역을 가진 두 대(23현 1대와 25현 1대), 혹은 세 대의 가야금(저음, 중음, 고음의 12현가야금)을 같이 놓고 동시에 연주한다. 서로 다른 악기를 동시에 연주함으로써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어 내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낼 수 없는 놀라운 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이다.

내 연주는 우리나라 최초의 동서양음악의 융합이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크로스오버’음악이다. 나는 창금으로 팝, 가요, 클래식, 민요 등을 연주하는데 연주가능한 곡이 모두 합쳐 1천 여곡 이상 된다. 내가 연주자로서 활동한 것은 1973년부터 였는데, 공식적인 무대에서 연주를 하고 방송을 탄 것은 MBC 정동시절 1984년 2월19일 MBC 라디오 윤건호 연출의 '별이 빛나는 밤에' 출연 "천익창의 개량가야금" 소개였고, 1987년 12월 13일 세종문화회관에서 KBS주최로 열렸던 연주회였다.

그 때 연주회 제목이 <최초의 양/국악의 만남>이었는데, 나는 KBS양악 관현악단 협연으로 내가 직접 개량한 가야금(창금)을 가지고 ‘로망스’와 ‘새타령’을 협연 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날이 내 결혼식 날이었던 거다. 오전에 종로 서울예식장에서 식을 올리고 부랴부랴 세종문화회관으로 달려와서 리허설도 못하고 무대에 오르는 바람에 신혼여행도 못가고 그 날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천익창의 악기중 개량 국악기 앞에서부터 10현 개량아쟁, 48현 가야금(23+25), 전자가야금(창금)


2. 언제부터 악기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나?

태어난 곳은 경북 예천이고 학교공부는 안동에서 했다. 초등학교시절에 집에 하모니카가 있어서 불며 놀았고 또 그림을 잘 그려서 학교에서 상도 받고 했다. 그런데 살아생전에 아버지가 내가 그런 예능에 관심을 갖는 걸 아주 안 좋아 하셨다. 학교 미술선생님이 실제 풍경을 보고 그리라고 화판을 들고 안동 시내를 여기저기 돌아다니니 그 소문이 아버지 귀에까지 들어가서 그림은 그려오면 다 아궁이에 넣고 태워버렸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악기 연주이다. 연주는 증거가 남지 않으니까 이걸 하기로 한 것이다.

중학교 1학년 때 안동에서 처음으로 황병창 선생님에게 바이올린을 배웠다. 기타는 조동욱이라는 선생님을 학원에 쫓아다니면서 배웠고 피아노는 하도 배운 선생님이 많아서 성함을 다 기억 못한다. 안동에 유명음대를 나온 선생님이 오면 모두 다 찾아가서 배웠으니까. 모두 다 기억 할 수 없는 정도다.

가정형편이 넉넉한 것도 아니었는데 집에 방이 여러 개라서 어머니가 그 방을 세를 주어서 나온 그 돈을 내가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다 타다가 레슨비로 쓴 거다. 그렇게 다녔어도 형제들한테 들킬까봐 얼마나 조심했는지 모른다. 아버지 돌아가신 다음에는 큰 형님이 참 무서운 존재였다.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내가 음악 배우고 다니는 걸 학교에서건 집에서건 아무도 몰랐다.

그러다가 이렇게 그냥 졸업하면 너무 억울할 거 같더라. 우리학교가 미션스쿨이었는데 한 번은 교감선생님한테 “내가 피아노를 배우는데 내 주변에는 이걸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러니 졸업하기 전에 교회에 기도할 때 피아노 연주 한 번만 하게 해 달라”라고 부탁을 했다. 그래서 학교에서 딱 한 번 피아노를 치게 되었는데 그 날 선생님이고 친구들이고 다들 깜짝 놀랐다. “뭐 저런 놈이 다 있냐”면서..


3. 서양악기보다 국악기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큰형님이 내게 고등학교 졸업하면 교대를 가야 한다고 하셨는데 나는 오직 음악을 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예비고사 날도 시험장에 가지 않았다.(당시엔 음악과는 예비고사 치를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시험 날에 내가 학교에 가지 않자 집안이 발칵 뒤집어졌다. 이유를 묻는데 그렇다고 내가 음악하고 싶다는 말을 할 용기는 도저히 나지 않아서 그냥 대뜸 ‘졸업하면 집을 나가겠다’고 말해버렸다. 그래서 이런저런 이유로 졸업 후 짐을 싸가지고 약 40일간 봉정사 영선암이라는 암자에서 혼자 있게 되었다. 거기에서 꿈속에 많은 영감을 받았다.

예전에 그렇게 좋아했던 피아노 바이올린 같은 서양악기 소리가 하루아침에 전혀 다른 소리로 들리는 경험을 했다. 꿈에서 들어 그 감동적인 소리를 찾아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어느 날 산에서 내려온 후에 우연히 약장사들이 하는 공연을 보게 되었는데, 예전엔 약장사들이 약을 팔 때 가설무대를 만들어 놓고 창 같은 공연을 하고 했었다. 그런데 거기서 아쟁이라는 악기를 처음 만났다.

그 소리가 꿈에서 들은 그 소리하고 너무도 비슷해 그걸 배우려고 악사한테 어디가면 배울 수 있냐고 연주하는 도중에 다그쳐 물었다. 악사가 ‘서울! 서울!’ 했는데 그 소리를 듣고 그 길로 바로 서울로 올라온 거였다. 그렇게 꿈 속에서 들은 그 음악을 재현하기 위해 오늘까지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살고 있다.


4. 지금까지 이룩하신 성과를 간략히 말씀해주신다면?

내게 공식적인 타이틀이나 남들에게 인정받은 업적은 없다. 그런데 나나 내 아이가 연주한 동영상을 찍어서 웹사이트에 올리면 비난 보다는 좋아하고 칭찬하는 덧글이 많다. 2007년경 나의 아이가 인터넷에 발표한 동영상에 수많은 네티즌들의 올린 감동의 글을 보았고(특히 48현 가야금 캐논), 또한 그로 하여 제1회 대한민국 UCC동영상 대상을 수상한 것으로 보아 대다수의 사람들은 좋아했든 것으로 기억한다.

안타까운 것은 그렇게 많은 분들이 좋아해 준 것에도 불구하고 우리부자(父子)에게 실질적인 삶에 도움을 줄 수 있고, 도움이 될 만한 사람들의 관심으로부터는 철저하게 외면당해온 사실이다. 인정해줌으로 써 더 한 발 나아갈 수 있는 영향력 있는 사람들은 우리를 인정해 주지 않으니 대다수 국민이 우리를 좋아한다고 해도 실제로 삶의 기반이나 연구가 진척될 수 있는 바탕이 없는 셈이다.

다만, 나 스스로 나를 표현 한다면 60평생 음악 이외의 무엇을 해본 일이 없고, 또한 할 줄 아는 것이 없지만 애써 성과를 묻는다면 보편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고 있는 바와 나 자신이 도달한 성과의 간격이 너무 커 스스로 고립되기도 했고 “ET”, “외계인”, “별종”, “괴물” 등의 별명이 붙기도 했다. 그러한 별명도 성과의 일환 아니겠나 싶다.



5. 창금의 향후 대중화 등 발전가능성에 대하여 말해주시면?

사람들한테 많이 질문 받은 것 중 하나가 “왜 자기 자식한테만 가르치고 다른 제자를 두지 않았느냐?”는 것 이었다. 그런데 내 생각은 이렇다. 실제로 우리 아이가 내 밑에서 십 년이 넘게 온갖 고생하면서 힘들게 배웠는데 그 아이가 그렇게 갈고 닦은 장기로 전문예능대학을 못 간다.

아이가 고교시절 악기를 싸가지고 이대 황병기교수, 한예종 김해숙교수에게 찾아가 눈앞에서 연주하고 진학에 대한 협조를 받을 려고 하였으나 실패 하였다. 아무리 열 손가락으로 기막히게 연주를 할 수 있어도 받아주는 대학이 없다. 이걸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어떤 부모가 나에게 자식을 보내겠는가. 또 내가 그 점에 대해서 노력을 안 해본 게 아니다. 76년도부터 국악계 영향력 있는 관련자를 비롯 청와대에 진정을 넣고 많은 국악계 교수들에게도 ‘내가 제자를 키울 수 있게 길을 열어달라’고 부탁을 수없이 했지만 그런 노력들이 계속 제도권에서 가로 막혀왔다.

아직도 생생한 기억은 약 20여 년전 지금은 은퇴 했지만 현 예술원회원 권오성씨가 한양대 교수로 있으때 황병기(당시이대교수), 이재숙(당시서울대교수), 양연섭(한양대교수) 이 세사람의 추천서를 받아 온다면 강의를 할수 있게 힘써 본다고 하였으나 단 한명에게도 추천서를 받을 수 없었다,

또한 그후 수년동안 청와대에 진정을 넣었으나 결과를 얻지 못하였다.
(관련자료: http://blog.paran.com/hyc53/18317544 )

나의 연구 작업에 발전이라면 예로 국내 제1회 대한민국 UCC 대상뿐만 아니라 내 아이 연주 동영상이 얼마 전에는 일본에 알려져서 굉장히 화제가 되었던 동영상을 본 일이 있다. 일본사람들이 처음에는 한국사람 인정 안하다가도 결국에는 대단하다고 칭찬하더라.

가끔씩 취미로 배우고 싶다는 사람들도 있는데, 평생을 바쳐서 이 길을 걸어온 나로서는 나의 아이를 가르킨 경험에 비추어 단시간내 전수 할수 있는 일이 아니므로 짧은 시간에 배울수 있는 가벼운 교육이 아님을 밝혀둔다.

나의 아들이 아주 어릴 적부터 연마해 온 열손가락 주법은 다 자란 성인이 어떤 노력을 한다고 해도 그 경지에 이를 수 가 없다. 이미 손가락 근육이 굳어졌기 때문이다. 어떤 악기든 배울 수 있는 시기가 있는 것이다. 스무 살이 넘으면 십년 20년을 연습해도 테크닉이 완성될 수가 없다.

실제로 음악학원에 가면 어떤 악기는 6개월 완성 프로그램도 있다고 하는데 나는 그렇게 가르칠 수 있다고 장담 못하겠다. 요즘은 다 입시위주의 교육이라 가끔 부모들에게 연락이 와도 묻는 말이 “이거해서 어느 대학 갈 수 있느냐”다. 대입이 최우선이다. 이제 내가 죽고 내 아이가 이 길을 가지 않으면 이 기능은 살아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어디까지나 아들의 결정을 존중할 것이다. 내가 그동안 살면서 고생한 걸 다 보고 자랐으니 현실적인 선택을 하더라도 충분히 이해한다.


6. 그렇다면 이렇게 훌륭한 기능을 기존 국악계가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어디에 있다고 보시는지?

나를 인정함으로써 그들의 기득권이 위태로울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만약에 학생들이 내가 가르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하여 내 쪽으로 몰리면 기존의 선생들은 제자들을 잃게 되어 입지가 좁아진다. 그걸 염려하는 것이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영악해서 어느 쪽에 줄을 서야 출세를 하는지 벌써 다 안다고 하는 기사를 본 일이 있다.


7. 창작곡 ‘오솔길’이 무척 인상 깊었다. 기교적으로도 뛰어나고 멜로디도 아름다웠는데 작곡의 아이디어는 어디서 얻으셨는지?

우리 아이가 초등학교 때 학교수업 끝나면 집에서 또 가야금 교육을 받았어야 했었는데 아이가 힘들어 할 때, 내가 같이 여기저기 다니면서 친구처럼 많은 시간을 지냈다. 사실 나는 음악을 가르쳐 주고 싶은 거였는데 그 때 어린아이를 강제로 시킬 순 없으니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서 ‘어디 놀러가자’ 이런 식으로 꼬신 거였다. <오솔길>은 아이하고 같이 오솔길을 걸어가면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사실 내가 만든 악기라 가르쳐 주려해도 이 악기를 위한 곡이 따로 없어서 내가 직접 곡을 만들어야 했다. 오솔길도 열손가락으로 연주하는 곡인데 들어보면 양손이 대화하듯이 선율을 주거니 받거니 한다. 그게 바로 오솔길을 지나는 아이와 나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이 곡을 아이가 처음에는 한 개 악기로 연주하다가 차츰 줄 수를 늘려가면서 지금은 48현(23현+25현)으로 연주할 수 있게 훈련이 된 거다.


8. 연주하는 것 이외에 다른 생업을 가진 적은 없었나?

결혼하기 전까지는 계속 연주자 생활을 했다. 그 이후에 나는 쭉 집에 들어앉아 연구를 하고 아내가 생활전선에 뛰어들게 된 거다. 내가 처음에는 피아노 바이올린 같은 서양악기를 다룰 줄 알았기 때문에 서울대학교 음대 작곡과를 응시하여 시험을 봤는데 떨어졌다.

그 후에 미 8군에 스카웃이 되었다. 거기서 건반악기를 연주했다. 그러다가 당시에 인기가 많던 민요가수들을 위해서 오르간 옆에 가야금을 같이 놓고 연주를 했다. 무대에서 강한 조명을 받으며 연주를 하다 보니 가야금 줄이 열에 쉽게 늘어져 음정이 맞지 않는 등의 문제들이 드러났다. 그러니 현장에서 쓸모가 있는 악기를 만들기 위해 계속 고치고 고쳤는데 요새 사람들 그 작업을 보고 “개량”이라고 표현하더라.


9. 선생님의 호칭 중에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국악계에 권오성 교수라고 계셨다. 한양대학교 국악과에 있다가 지금은 은퇴한 분이다. 그 분이 초장기에 노량진 수산시장 언덕위 회집에서 술을 한 잔 하시더니 갑자기 “자네 혹시 외계인 아니냐?” 이러셨다. 느닷없이 그렇게 말 하시길래 나도 깜짝 놀랐는데 그 별명이 잊혀지지가 않더라. 그 다음에 ‘별종’이라는 별명은 아내가 나한테 붙여준 말이다. 또 최근에 인터넷에 어떤 사람이 나의 유튜브 동영상 연주들을 모아놓고 소개 글을 달아 놨는데 “이건 사람이 아니라 괴물”이라고 했더라. 아내에게 보여 주었더니 “맞는 말인데, 뭘!” 이러더라.


10. 서울에서 연주를 많이 한 곳은 어디인가?

인터넷이 보편화 된 시기 이전에는 내가 연주를 참 많이 다녔다. 말하자면 1974년도 당시에 명동에 가면 라이브 홀(극장식당)이라 불리던 큰 공연장들이 많았는데 그 많은 홀 중에 내가 연주를 안 한 곳이 없을 정도였다. 그 무대에서 전자올겐, 가야금을 연주 했었다. 내가 73년도부터 가야금 연주를 했으니 연주 경력은 삼, 사십년도 더 되었다. 내 라이브 홀 마지막 무대는 지금은 없어졌지만 명동 롯데호텔에 있는 스카이 프라자였다. 지금 내가 인터넷에 올려둔 곡들 - 김건모 등 당시 인기가요나 팝송 - 을 연주했는데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지 내가 무대에 서는 시간만 되면 사람들이 그 큰 홀에 가득 찼었다.


11. 유튜브에 선생님과 아들(천새빛)이 연주한 동영상이 많다. 언제부터 촬영으로 기록하게 되었고, 그 이유는?

2007년경 나의 아들이 국내 동영상 사이트에 자신의 연주영상을 올린 후에 수 많은 네티즌들이 여기저기 퍼다 날라서 유튜브를 비롯한 많은 사이트에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단 하나의 사이트에서도 수백만 건의 조회수와 많은 감동의 댓글을 본 일이 있었는데 어느 날 그 영상이 갑자기 삭제된 것을 볼 때 너무 허탈하고 아쉬웠다. 그런 일이 여러 번인데 이상하게 조회수가 많은 것들이 삭제가 되었다. 그래서 2010년 4월경부터 초기의 자료를 정리하여 유튜브에 직접 올리게 되었다.


12. 인터넷 활용과 연주공연은 요즈음에도 계속하고 하는지?

인터넷에 영상을 올려두는 유튜브(http://www.youtube.com)를 활용하여 자료를 올리고 있다. 인터넷은 ‘내가 현장에서 힘들게 무대에 올라가 연주하지 않아도 남들이 내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방법이 이렇게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들이 군 입대 하기 전에 그 간에 연주했던 레퍼토리들을 모두 동영상으로 정리해서 인터넷에 올려두기 시작한 것이다.

2007년 국내, 외 동영상 사이트에 퍼져있는 아들이 연주한 캐논 동영상을 보고 “스타킹”이라는 TV프로그램에서도 연락이 온 거였다. 조회 수가 한창 올라갈 때는 백 만 회 이상 올라가기도 했다. 아들이 군에 들어간 2008년부터 약 2 년 정도는 여기저기 연주를 다니지는 못했다. 연주는 아들하고 둘이 같이 다니곤 했으니까.


13. 현재 진행 중인 작업이 있다면?

천익창의 악기중 진품악기와 복원악기 오른쪽부터 비봉리현악기(6·~7천년전 한반도 현악기), 신석기 현악기, 철기시대 현악기, 오동나무가 악기로 선택된 시기 현악기, 신라시대 신라금, 일제시대 산조가야금, 일제후기 절금.



나는 이미 한반도 신석기 현악기, 비봉리 현악기(6~7천년전) 원시인류 뼈피리(약50~100만년전)를 복원하여 인터넷에 발표한 바 있다. 그것들을 연구하는 과정에 한반도에서 인류생성과정의 유물, 유적지가 흔적 없이 파괴되고 사라진 것을 보고 크게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가슴에 맺힌 형상들을 어떻게 재현 할 수 있을까 고심하다 도자기를 통해 재현하고자 현재 작업 중에 있으며, 이 역시 멀지 않은 시기 인터넷에 동영상으로 발표할 예정이다.


천익창의 악기중 세계각국에서 발굴된 뼈피리 학뼈, 독수리뼈, 사슴뼈, 각종 동물뼈와 조류뼈 복원(4천년전~1백만년전), 한반도 선사유물 복원(구석기, 신석기).



-끝-

2011년 5월 26일 목요일

국립중앙박물관 "우리악기 우리음악" 특별전과 관련하여,

국립중앙박물관 "우리악기 우리음악" 특별전과 관련하여,



국립중앙박물관 "우리악기 우리음악" 특별전과 관련하여 공권력에 의한 역사의 조작이 얼마나 집요한지 필자(천익창)는 다시한번 지적하고 모든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들이 지금 바로 확인 할 수 있게 다시한번 지적하고자 합니다.


현재 국립국악원 개원 60주년 기념 특별전이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시실 "우리악기 우리음악" 특별전(2011. 5. 10~6.26)이 열리고 있으며 전시장 입구에 "광주 신창동 출토 현악기"라는 유물을 삼한(마한)시대 현악기로 규정하고 논리에 맞지 않은 역사 왜곡을 6~7년째 반복하고 있습니다.


필자(천익창)는 수년째 이 유물은 악기가 아니라고 발표하였으나 호시탐탐 이 유물은 유령처럼 부활하니 다시한번 이 유물이 악기가 아닌 것을 증명하고, 이유물이 악기보다 더 소중한 문화 유산일수 있음을 감안 할 때 왜 꼭 악기가 되어야 하는지 억지스러운 주장이 국가의 신뢰도를 떨어 떨이고 더 큰 역사 왜곡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입니다.




[자료 1]삼한(마한)시대 현악기로 소개한 광주 신창동 출토 유물




[자료 2] 광주 신창동 출토 삼한(마한)시대 유물을 현악기로 규정하고 복원 소개한 광주 신창동 유물복원품




[자료 3] 필자(천익창)는 여러 해 동안 전국 여러 박물관에서 복제품만 보아 왔으나 이번 전시품은 진품이 확실하여 이유물이 악기였다면 악기 일 때 필연적으로 흔적을 남길 수 있는 줄 걸이 부분을 확대 촬영하여 일반적 현악기와 비교해 이유물이 악기가 아닌 것을 증명하고자 한다.



일반적 현악기들의 줄이 걸려진 부분 비교




[자료 4] 바이올린 줄 걸이부분 A , 이 부분은 4개의 줄의 간격을 일정하게 하기위해 인위적으로 홈을 만들 수도 있지만 오래 연주를 하게 되면 줄의 압력에 의해 홈이 생기기도 한다.




[자료 5] 바이올린 줄 걸이부분 B , 이 부분역시 4개의 줄의 간격을 일정하게 유지시키기 위해 인위적으로 홈을 만들어 줄의 간격을 일정하게 유지시켜 준다.





[자료 6] 현악기 줄 조리개 사용한 흔적이 있는 위쪽 4개, 사용하지 않은 흔적이 없는 아래 4개

* 어두운 화면은 식별이 어려움, 밝은 화면으로 보기를 권유함.




[자료 7] 가야금의 줄 걸이 부분 사용한(연주한) 악기 들은 줄이 닫는 부분에 깊게 패인 흔적을 남긴다




[자료 8] 목제 판에 굵기가 다른 명주 현을 걸고 소리가 날수 있는 정도로 조일 때 각진 부분에 줄이 목제 속으로 파고든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자료 9] 명주 현으로 조여졌든 줄을 풀면 90도 직각 면에 줄(현)이 파고든 흔적을 확인 할 수 있다.




[자료 10] 광주 신창동 출토 삼한(마한)시대 현악기로 규정된 이 유물에서는 각진 면에 줄이 걸려 악기로 사용된 흔적을 확인할 수 없고 6~7개의 홈만 확인할 수 있다,



유튜브 동영상으로 보는 목제악기 줄 흔적 실험 1

http://www.youtube.com/watch?v=V0Ho0OagCmg



유튜브 동영상으로 보는 목제악기 줄 흔적 실험 2

http://www.youtube.com/watch?v=FI7MkCYt2RQ




결 론



위에서 보는바와 같이 여러 종류의 현악기들의 줄 걸이 부분을 볼 때 광주 신창동 출토 유물을 악기로 볼 수 있는 결정적인 흔적을 찾을 수 없고 이미 이전 수년에 걸쳐 악기가 될 수 없는 이유는 아래 첨부된 자료에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광주 신창동 출토 유물이 악기보다 더 소중한 문화유산 일수 있음을 감안 할 때 왜 꼭 악기가 되어야 하는지 수년 동안 억지스러운 주장이 더 큰 역사 왜곡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입니다.


일반적으로 대부분 목제로 만들어진 현악기들은 악기의 몸통과 현이 닫는 표면은 장력으로 인한 마찰로 패여 지는 흔적을 남기나, 발굴된 이 유물에서는 그러한 흔적을 발견 할 수 없어 악기로 규정할 수 없고 복원된 "자료 2" 역시 이렇게 만들어 졌을 때 소리를 낼수 없는 문제를 안고 있어 이 또한 악기로 볼 수 없습니다.


필자(천익창)는 2005년 처음으로 이 유물이 악기로 복원 발표될 때부터 줄곧 악기가 될 수 없는 이유를 밝혀 왔으나 공권력의 납득할 수 있는 변명 없이 지속적이고도 집요한 날조, 조작은 국가의 신뢰도를 떨어 떨이는 행위로 나라를 팔아 먹고도 당당할 수 있는 자나 그 하수인들이 아니고선 할 수 없는 일로서 지금껏 그래 왔듯이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날조, 조작을 할 것이라 생각하니 이와 같이 부당함을 견제 못하는 권력 없고 능력 없는 자신이 한심스러울 뿐입니다. - 2011. 5. 천익창 -




공권력에 의한 지속적 역사왜곡 관련자료 바로보기:


신창동 현악기 해석오류 전국 국공립박물관에서 철수 되어야! 2009/01/29
http://blog.paran.com/hyc53/29787345


국보 287호 백제금동대향로 백제인의 작품인가? 2006/04/11
http://blog.naver.com/hyc53?Redirect=Log&logNo=50003359112


진실조작 황우석 논문에만 국한된 것인가? 2005/12/29
http://blog.naver.com/hyc53?Redirect=Log&logNo=50000526307


국립국악원 제9회 동양음악학국제학술회의, 복원악기전시와 관련하여 2005/09/03
http://blog.naver.com/hyc53?Redirect=Log&logNo=40017077411


국립국악원 고대악기 복원악기가 될 수 없는 이유 입니다. 2005/05/30
http://blog.naver.com/hyc53?Redirect=Log&logNo=40013631379




■ 천익창 경력및 활동

http://iboard2.superboard.com/board.cgi?db=28_dwhyc53noti251&idx=8&page=8



유튜브에 개설된 천익창의 동영상 사이트

http://www.youtube.com/hyc53#p/u

http://www.youtube.com/hyc53?gl=KR&hl=ko#g/u


천익창( Ikchang Cheon) 010-8790-7776,
E-mail: hyc53@dreamw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