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월 21일 토요일

일제시대 탄생한 산조 가야금 산조음악과 한국의 악기장

일제시대 탄생한 산조 가야금 산조음악과 한국의 악기장


일제시대 일제는 우리전통문화 말살정책을 펴왔으나 그들이 고안하고 보급한 기방문화의 상징 산조가야금과 가야금 산조 음악은 확실하게 뿌리내려 현재 한국전통문화의 대표문화로 자리잡게 되었다

일제시대 일제는 조선악기를 만들면 사상법으로 몰아 자유로운 악기 제작 활동을 탄압 방해 하였다.

하지만 일제에 의해 만들어진 산조 가야금 산조 음악은 일제시기 기방문화로 정점에 달하였으며 2012년 현재까지도 여러지역에서 일제시기 제작된 산조가야금이 발견되며, 그 시기에 생겨난 여러 연주자들에 의해 그 맥이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기득권 주류문화로 튼튼히 전승되고 있다.



일제시대 일본인에 의해 만들어진 산조가야금과 2012년 현재까지도 사용되고있는 산조가야금


지난 1979.12. 8 일자 경향신문 "대를 잇는다, 보람에 사는 외길인생, 악기장 김광주옹~전수자 최세춘씨"에 따르면 한국최초의 악기장으로 중요무형문화재 42호로 인정(1971)받게 된 김광주 악기장의 악기를 처음 접하며 악기장으로 탄생되는 과정을 알수 있는 의미있는 기사가 있어 이 기회에 소개 하기로 한다.


(경향신문 1979.12. 8일자 " 대를 잇는다, 보람에 사는 외길인생(48) 악기장 김광주옹~전수자 최세춘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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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가 고향인 김옹은 27살이 될때까지 장가도 못가고 목공일로 생계를 잇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자전거를 타고 심부름을 가다가 웬 노인이 문을 열어놓고 거문고를 타고 있는 것을 보고는 돌부처 처럼 그 자리에 우뚝 섰다.

"참 소리가 듣기 좋더군, 물론 그때는 그 악기가 거문고인지 몰랐지, 도대체 처음 보는 것이 었으니까"

그일이 인연이 되어 낮에는 목공일을 하고 밤이면 그 노인을 찾아가 처음에는 탄주법을 배웠으나 곧 직업의식이 발동 않을수 없었다.

"만들어 보고 싶다"고 김옹이 그할아버지에게 간청했으나 자신도 어떻게 만드는지 모르니 안될것이라고 잘라 말했지만 김옹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거문고를 놓고 오동나무를 잘라다가 목공일하던 솜씨로 나무를 주무르기 1달만에 대강 흉내는 냈으나 소리가 제대로 날리 없었다. 그러기를 1년여, 나무와의 씨름에서 김옹은 드디어 승리할수 있었다. 고운 소리를 내는 거문고를 만들어 냈던 것이다.

그러나 기쁨도 잠깐이었어 일본형사가 조선 악기를 만든다고 사상범으로 몰아세우더구먼 할수없이 눈을 피해 방공호로 숨어들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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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1979.12. 8일자 " 대를 잇는다, 보람에 사는 외길인생(48) 악기장 김광주옹~전수자 최세춘씨" 중에서)


김광주(1906~1984. 4)가 한국최초의 중요무형문화재 제42호 악기장 기능보유자로 인정받게 된 것은 1971년 그가 악기를 처음 알고 제작한 1933년 일제시대 후반기 그의 나이 27세때의 일이며 김광주 나이 39세때인1945년에 해방 되었고 악기 제작한지 38년 만에 중요무형문화재 42호 악기장이 되었다.

1984년 4월 김광주가 사망후 그의 제자들에 의해 전통 국악기중 현악기들이 많은수 만들어 지고 있으며 중요무형문화재가 된 사람을 포함해 전국에 걸처 많은수 악기 제작에 참여하고 있다.

김광주의 제자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악기 제작자들이 산조가야금을 역사가 깊은 우리의 전통악기로 알고 있는 것은 일제의 암흑기를 거치면서 예상치 않든 혼란스런 해방을 맞이하는 사이 대부분 생계가 다급한 백성들은 전통이 무엇인지 관심을 두지 않든시기에 마지막 이왕직아악부 몇남지 않은 예인들에 의해 새로운 조직이 형성 되어 그들에 의해 비판없이 정착되었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 발발시기 일본 천황을 찬양하며, 조선의 젊은 청년들을 전쟁터로 몰아넣은 황화만년지곡을 만들고 발표한 친일 인사인 김기수를 비롯 이왕직아악부 마지막 악사들에 의해 국립국악원이 생기고 국악사 양성소(현 국립국악고등학교)가 생겨나니 이전에 기방의 예인들 또한 그들과 합류하여 한국의 전통 주류문화로 발판을 다지게 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였을 것이다.




일장기를 걸고 일본천황을 찬양하는 이왕직아악부(李王職雅樂部)의 김기수작곡의 황화만년지곡(皇化萬年之曲)연주(1940. 11. 9 부민관, 일본기원 2600년을 기념하는 봉축연)


이제 세월이 흘러 일제강점기에 일제에 의해 생겨난 문화를 일제문화니 한국의 전통이니 따지냐고 할수도 있겠으나 모르고 추종하는 것과 알고 행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것이라 진솔하게 지적하는 것이다.

필자는 필자의 주장이 잘몰라서, 잘못된 주장이길 바라며,

악기 제작자나 가야금 산조 전수자들 누구든 국악계 종사자들의 또 다른 이견(異見)이 있길 기대하며, 산조가야금, 산조음악이 필자의 주장보다 더 훨씬 오래된 한반도 전통문화라는 사실을 증거를 제시해 밝혀주길 바란다.

또한 지금껏 그래왔고 지금처럼 산조가야금 산조음악이 마치 오래된 전통인양 막연한 심증으로 국민을 기만하는 억지 학문으로 지속되지 않길 바란다.



친일매국노 주요인물 109명 매국행적과 약력 중 음악부분 김기수

*김기수(金琪洙·光山哲三, 국악 작곡)-1940년 11월 9일 일본기원 2600년을 기념하는 봉축연회에서 이왕직 아악부가 연주한 '황화만년지곡' 작곡. 이 곡은 이능화의 1939년 한문시에 곡을 붙여 일본기원 2600년 기념 공모 당선작, 국내 최초로 오선보로 작곡된 국악 창작.


일제시대 일제문화의 상징 산조가야금 관련자료 바로보기;

일제강점기 일본인에 의해 탄생한 산조 가야금 산조음악 감상법
http://blog.naver.com/hyc53/50131035207


일제시대 일제문화의 상징 산조가야금 변천사
http://blog.naver.com/hyc53/50130126673

일제시대 조선인 탄압의 현장과 일제문화의 상징 산조가야금
http://blog.paran.com/hyc53/46215537

산조가야금, 천익창의 일제시기 가야금(문화)이야기 -연화-
http://blog.daum.net/hyc53/14032019



한반도 현악기 역사 시대별자료 바로보기


조선시대 김창조 풍류가야금(정악, 법금)과 신라시대 신라금 바로보기;
http://blog.daum.net/hyc53/14032020


한반도 철기시대 현악기 바로보기;
http://cafe.naver.com/hyc53/50


한반도 신석기 시대 현악기 바로보기;
http://cafe.naver.com/hyc53/43


한반도 신석기 시대 비봉리 현악기 바로보기;
http://kr.blog.yahoo.com/ehyc53/1127


천익창이 본 이왕직 아악부 마지막 악기장 강상기 전, 후 한국의 악기장
http://blog.naver.com/hyc53/50109827423



천익창 경력및 활동
http://iboard2.superboard.com/board.cgi?db=28_dwhyc53noti251&idx=8&page=8

유튜브에 개설된 천익창의 동영상 사이트
http://www.youtube.com/hyc53#p/u
http://www.youtube.com/hyc53?gl=KR&hl=ko#g/u

천익창( Ikchang Cheon) 010-8790-7776, E-mail: http://mail.dreamwiz.com/AUTH/mail.cgi?c=W&to=hyc53@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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