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월 8일 일요일

일제강점기 일본인에 의해 탄생한 산조 가야금 산조음악 감상법

일제강점기 일본인에 의해 탄생한 산조 가야금 산조음악 감상법(이해하기)

필자는 가야금 산조 음악을 이해 하는데 많은 부담을 느끼는 젊은이 들과 많은 한국 사람들에게 좀더 가까이 이해 될수 있는, 이해에 도움이 될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 사실적 근거를 바탕으로 이글을 쓴다.

가야금산조 음악을 감상하기 위해선 음악뿐만 아니라 산조가야금과 가야금 산조 탄생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음악을 이해 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이미 이전에 발표한 글에서 밝힌 바와 같이 산조 가야금 탄생은 일제시대 일본인에 의해 서대문 형무소에서 제소자들에 의해 강제로 제작되어 기생들에게 공급된 것이라고 밝힌 바가 있다

그시기 전국에 산재한 일본인이 관할 통제하는 전국의 형무소에 지배계급의 일본인이 있었고 그들이 받는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기방이 있었다, 또한 기방에는 그들이 제공한 기방문화의 필수품인 산조가야금 또한 있었다.




일제강점기 전국 형무소 배치도(1936)

일제강점기 세계정복에 혈안이된 일본인들은 저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독립을 부르짖는 조선인을 살육과 탄압으로 일관 하였으며 그들이 남긴 흔적들은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에 보존, 복원중에 있으며, 탄압의 흔적은 전 국토에서 행하여 졌다.

그중 일부 복원된 고문을 위한 고문 기구들은 정신을 혼미하게 하고 사지를 얼어 붙게 한다.


취조때 사용된 여러종류의 고문기구


한사람이 겨우 누울수 있는 정도의 똥통이 있는 독방과 4면에 쇠꼬챙이가 박힌 4각 박스 고문기구



벽관 고문

옴짝달싹할 수도 없이 좁은 공간에 사람을 감금하여 앉을수도 움직일 수도 없는 고통을 주엇던 고문도구 벽에 서 있는 관이라 하여 '벽관'이라 이름 붙여졌다.


지하독방

취조 후 옥사로 이동하기 전 감금했던 곳, 곳곳에서 들려오는 고통의 비명소리와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고문의 공포로 휩싸인 공간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지하독방에서도 독립운동가는 만세소리를 멈추지 않았고, 독립의 다짐을 되새겼다(서대문 형무소역사관)




민족의 빛 독립운동가 육성증언


...(여자들은)자궁에다 막대를 넣고 휘젓고..... 남자들은 성기에다 심을 박고 불지르는 거.... ...차라리 죽는 게 나았어 죽여 달라고 아우성을 치지 죽는게 낫거든 아픈것 보다 죽는 게 나아... (애국지사 이병희 증언중)


일제시대 서대문 형무소 독립운동가의 물고문


일제시대 서대문 형무소 독립운동을 한 여성들의 주리틀기 고문


사형장 담벼락과 바깥쪽 통곡의 미루나무 이 미루나무는 1923년 사형장 건립당시 식재되었다.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애국지사들이 마지막으로 이 나무를 붙잡고 조국의 독립을 이루지 못하고 생을 마감해야 하는 원통함을 눈물로 토해내며 통곡했다고 하여 '통곡의 미루나무'라고 이름 지어졌다.



한편, 사형장 안쪽에 같은 시기 식재된 미루나무가 있으나, 너무나 억울한 한이 많이 서려 잘 자라지 못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서대문형무소역사관)


사형장과 담벼락 안쪽의 미루나무



고문에 의한 고통보다 차라리 죽는 게 나아 저항없이 목숨을 버렸든 독립운동가들 일제시대 서대문 형무소 사형장과 모퉁이에 서 있는 작은 미루나무 너무나 억울한 한이 많이 서려 잘 자라지 못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일제강점기 서대문 형무소에서는 독립운동가들의 참혹한 고문의 현장이 있었으며 피비린네 나는 고문과 고통의 비명소리가 있었고, 억울한 죽음이 있었다.


이시기(일제강점기) 피해자의 고통은 말로 다 할수 없지만 가해자인 일본인들 또한 많은 스트레스에 시달렸을 것이다. 스트레스에 시달렸다면 그들은 그 스트레스를 무엇으로 풀었겠는가,


일제강점기 지배계층의 일본인 남성들은 무엇으로 스트레스를 해소 하였는가?

위에서 보는바와 같이 조선반도를 점령하고 세계정복을 꿈꾸는 일본인들의 야망은 많은 희생을 필요로하고 그들 스스로도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렸을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그로 인해 받는 스트레스를 무었으로 해소 하였는가,


모든 자연계, 동물의 세계에도 마찬가지 이지만 정복에 따른 수컷들의 일차적 보상은 섹스에 있다.


그들은 섹스로 많은 스트레스를 해소 하였다


일예로 전쟁터에 끌려다니며 희생당한 위안부들이 있으며 지배계층을 상대로한 기생들이 이었고 그 중심에 그들이 고안하고 제공한 기방문화의 대표 산조가야금이 있었다.



조선반도를 강점한 일제시대 일본인들에 의해 고안되어 기생들에게 보급된 산조 가야금을 연주하는 기생


일제시대 기생들은 조선인으로 격은 비애는 남달랐을 것이며, 한편 부를 축척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도 하였다,


축척된 자금은 후일 자신들의 명예회복에 일조를 하며, 무형문화재도 되고, 국공립교육기관 설립에 일조를 하기도 한다.



일제시대 일본인에 의해 만들어진 산조가야금 변화 과정


좌로부터, 첫번째 일제시대 초기제작된 산조가야금, 두번째 문제점이 개선되어 제작된 산조가야금, 세번째 일제시대 후기에 절단된 절금


좌로 네번째, 우측 첫번째 2011년 현재 가장 많이 보급된 일반적인 형태의 산조가야금, 일제의 흔적이 대부분 제거 되었으나 기본적인 형태는 변함이 없으며, 제작자에 따라 여러가지 문양의 도안을 사용하며, 소뼈, 자개, 금, 옥, 칠보등으로 장식을 하기도 한다.


이 시기 민간에서 가혹 일제의 산조가야금을 모방한 가야금이 나오기도 하였는데 특징이라면 세련됨이 부족 하였고, 일제를 상징하는 문양이나 나전칠기 자개장식의 화려함이 부족 하였으며, 부들 메듭 공(孔)이 24공(孔)이 아닌 이전 현악기 제작모양과 같은 12공(孔)을 사용하는 특징을 가지며, 기생들에게 인기를 얻지 못하고 주류악기에 밀리어 지속적 발전을 하지 못하였다.

일제시대 제작된 산조 가야금은 경성(서울)뿐만 아니라 그들이 설치한 전국형무소에 파견된 일본인 중심의 기방에 산조가야금이 있을수 있기때문에 아직도 파손되어 사라지지 않았다면 발견될수 있는가능성이 있으며 필자가 확인한 광주, 대전, 춘천에서 촬영한 산조가야금을 공개 한다



춘천지역에서 발견된 산조 가야금


대전지역에서 발견된 산조 가야금



광주지역에서 발견된 산조 가야금

일제강점기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독립운동가가 아니드라도 희희낙낙 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극소수 친일 매국 권력자나 부호가 아니라며, 기방에 출입할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대다수 일본 남성과 친일 매국 권력자들이 기방에서 그들은 무엇을 하였겠는가, 고상하게 한복 차려입고 가야금 산조연주를 30~60분동안 연주하는 것을 집중하여 감상 하였겠는가?


손톱 밑에 쇠꼬챙이를 찔러놓고 들어야 하는 비명소리, 사타구니에 지렛대를 끼워 넣고 주리를 틀며 들어야 하는 비명소리, 죽기가 억울해서 미루나무를 잡고 통곡을 하는 조선인들을 상대하는 조선반도에 주둔하는 일본 남성들의 일상 이였다면 그 스트레스는 아마도 정신병을 갖기에 부족함이 없었을 것이다


이들이 어떻게 스트레스를 해소 했는지 짐작이 어렵지 않다.


하루 종일 지옥같은 비명소리에서 벗어나 조선의 여인을 품에 끌어안고 조선의 여인이 들려주는 가야금 소리라면 그 소리가 생수같은 깊은 산속 천연약수 같은 소리가 아니였겠는가


그들이 느낀 쾌락을 상상하기가 쉽지 않다


오죽하면 줄줄이 복상사(腹上死)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는가,


일제시대 복상사(腹上死)관련기사 바로보기: http://www.sisapress.com/news/articleView.html?idxno=51953#


이글의 제목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 글은 가야금산조 이해 하는 법(감상법)이다,


과거로 돌아가 똑같은 환경을 재현하여 당시의 일본인이 되어 가야금 산조를 듣는 다면 생수같은 깊은 산속 천연약수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나,


그것을 재현 하기란 불가능 한 것이라 비명 소리라도 듣고 가야금 산조를 감상 한다면 조금 이나마 이해 하기가 쉽지 않을까 한다.


TV 드라마 혹은 영화나 음악중 죽을 듯한 비명 소리를 10분 이상 들을수 있다면 듣고 난후 가야금 산조 음악을 듣기를 추천한다.


천상의 소리, 생수 같은 깊은 산속 천연약수 같은 소리를 느낄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문화 예술을 이해 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경우 시대적 배경을 이해 함으로 이해에 도움이 될 수 있어 산조가야금과 가야금산조 음악의 탄생배경을 살펴 보았다.


일제시대 일제문화의 상징 산조가야금 관련자료 바로보기;

일제시대 일제문화의 상징 산조가야금 변천사

http://blog.naver.com/hyc53/50130126673


일제시대 조선인 탄압의 현장과 일제문화의 상징 산조가야금 http://blog.paran.com/hyc53/46215537


산조가야금, 천익창의 일제시기 가야금(문화)이야기 -연화- http://blog.daum.net/hyc53/14032019


한반도 현악기 역사 시대별자료 바로보기

조선시대 김창조 풍류가야금(정악, 법금)과 신라시대 신라금 바로보기; http://blog.daum.net/hyc53/14032020


한반도 철기시대 현악기 바로보기;
http://cafe.naver.com/hyc53/50

한반도 신석기 시대 현악기 바로보기;
http://cafe.naver.com/hyc53/43

한반도 신석기 시대 비봉리 현악기 바로보기;
http://kr.blog.yahoo.com/ehyc53/1127

천익창이 본 이왕직 아악부 마지막 악기장 강상기 전, 후 한국의 악기장 http://blog.naver.com/hyc53/50109827423


■ 천익창 경력및 활동
http://iboard2.superboard.com/board.cgi?db=28_dwhyc53noti251&idx=8&page=8

유튜브에 개설된 천익창의 동영상 사이트
http://www.youtube.com/hyc53#p/u
http://www.youtube.com/hyc53?gl=KR&hl=ko#g/u

천익창( Ikchang Cheon) 010-8790-7776, E-mail: hyc53@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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