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 "우리악기 우리음악" 특별전과 관련하여,
국립중앙박물관 "우리악기 우리음악" 특별전과 관련하여 공권력에 의한 역사의 조작이 얼마나 집요한지 필자(천익창)는 다시한번 지적하고 모든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들이 지금 바로 확인 할 수 있게 다시한번 지적하고자 합니다.
현재 국립국악원 개원 60주년 기념 특별전이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시실 "우리악기 우리음악" 특별전(2011. 5. 10~6.26)이 열리고 있으며 전시장 입구에 "광주 신창동 출토 현악기"라는 유물을 삼한(마한)시대 현악기로 규정하고 논리에 맞지 않은 역사 왜곡을 6~7년째 반복하고 있습니다.
필자(천익창)는 수년째 이 유물은 악기가 아니라고 발표하였으나 호시탐탐 이 유물은 유령처럼 부활하니 다시한번 이 유물이 악기가 아닌 것을 증명하고, 이유물이 악기보다 더 소중한 문화 유산일수 있음을 감안 할 때 왜 꼭 악기가 되어야 하는지 억지스러운 주장이 국가의 신뢰도를 떨어 떨이고 더 큰 역사 왜곡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입니다.
[자료 1]삼한(마한)시대 현악기로 소개한 광주 신창동 출토 유물
[자료 2] 광주 신창동 출토 삼한(마한)시대 유물을 현악기로 규정하고 복원 소개한 광주 신창동 유물복원품
[자료 3] 필자(천익창)는 여러 해 동안 전국 여러 박물관에서 복제품만 보아 왔으나 이번 전시품은 진품이 확실하여 이유물이 악기였다면 악기 일 때 필연적으로 흔적을 남길 수 있는 줄 걸이 부분을 확대 촬영하여 일반적 현악기와 비교해 이유물이 악기가 아닌 것을 증명하고자 한다.
일반적 현악기들의 줄이 걸려진 부분 비교
[자료 4] 바이올린 줄 걸이부분 A , 이 부분은 4개의 줄의 간격을 일정하게 하기위해 인위적으로 홈을 만들 수도 있지만 오래 연주를 하게 되면 줄의 압력에 의해 홈이 생기기도 한다.
[자료 5] 바이올린 줄 걸이부분 B , 이 부분역시 4개의 줄의 간격을 일정하게 유지시키기 위해 인위적으로 홈을 만들어 줄의 간격을 일정하게 유지시켜 준다.
[자료 6] 현악기 줄 조리개 사용한 흔적이 있는 위쪽 4개, 사용하지 않은 흔적이 없는 아래 4개
* 어두운 화면은 식별이 어려움, 밝은 화면으로 보기를 권유함.
[자료 7] 가야금의 줄 걸이 부분 사용한(연주한) 악기 들은 줄이 닫는 부분에 깊게 패인 흔적을 남긴다
[자료 8] 목제 판에 굵기가 다른 명주 현을 걸고 소리가 날수 있는 정도로 조일 때 각진 부분에 줄이 목제 속으로 파고든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자료 9] 명주 현으로 조여졌든 줄을 풀면 90도 직각 면에 줄(현)이 파고든 흔적을 확인 할 수 있다.
[자료 10] 광주 신창동 출토 삼한(마한)시대 현악기로 규정된 이 유물에서는 각진 면에 줄이 걸려 악기로 사용된 흔적을 확인할 수 없고 6~7개의 홈만 확인할 수 있다,
유튜브 동영상으로 보는 목제악기 줄 흔적 실험 1
http://www.youtube.com/watch?v=V0Ho0OagCmg
유튜브 동영상으로 보는 목제악기 줄 흔적 실험 2
http://www.youtube.com/watch?v=FI7MkCYt2RQ
결 론
위에서 보는바와 같이 여러 종류의 현악기들의 줄 걸이 부분을 볼 때 광주 신창동 출토 유물을 악기로 볼 수 있는 결정적인 흔적을 찾을 수 없고 이미 이전 수년에 걸쳐 악기가 될 수 없는 이유는 아래 첨부된 자료에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광주 신창동 출토 유물이 악기보다 더 소중한 문화유산 일수 있음을 감안 할 때 왜 꼭 악기가 되어야 하는지 수년 동안 억지스러운 주장이 더 큰 역사 왜곡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입니다.
일반적으로 대부분 목제로 만들어진 현악기들은 악기의 몸통과 현이 닫는 표면은 장력으로 인한 마찰로 패여 지는 흔적을 남기나, 발굴된 이 유물에서는 그러한 흔적을 발견 할 수 없어 악기로 규정할 수 없고 복원된 "자료 2" 역시 이렇게 만들어 졌을 때 소리를 낼수 없는 문제를 안고 있어 이 또한 악기로 볼 수 없습니다.
필자(천익창)는 2005년 처음으로 이 유물이 악기로 복원 발표될 때부터 줄곧 악기가 될 수 없는 이유를 밝혀 왔으나 공권력의 납득할 수 있는 변명 없이 지속적이고도 집요한 날조, 조작은 국가의 신뢰도를 떨어 떨이는 행위로 나라를 팔아 먹고도 당당할 수 있는 자나 그 하수인들이 아니고선 할 수 없는 일로서 지금껏 그래 왔듯이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날조, 조작을 할 것이라 생각하니 이와 같이 부당함을 견제 못하는 권력 없고 능력 없는 자신이 한심스러울 뿐입니다. - 2011. 5. 천익창 -
공권력에 의한 지속적 역사왜곡 관련자료 바로보기:
신창동 현악기 해석오류 전국 국공립박물관에서 철수 되어야! 2009/01/29
http://blog.paran.com/hyc53/29787345
국보 287호 백제금동대향로 백제인의 작품인가? 2006/04/11
http://blog.naver.com/hyc53?Redirect=Log&logNo=50003359112
진실조작 황우석 논문에만 국한된 것인가? 2005/12/29
http://blog.naver.com/hyc53?Redirect=Log&logNo=50000526307
국립국악원 제9회 동양음악학국제학술회의, 복원악기전시와 관련하여 2005/09/03
http://blog.naver.com/hyc53?Redirect=Log&logNo=40017077411
국립국악원 고대악기 복원악기가 될 수 없는 이유 입니다. 2005/05/30
http://blog.naver.com/hyc53?Redirect=Log&logNo=40013631379
■ 천익창 경력및 활동
http://iboard2.superboard.com/board.cgi?db=28_dwhyc53noti251&idx=8&page=8
유튜브에 개설된 천익창의 동영상 사이트
http://www.youtube.com/hyc53#p/u
http://www.youtube.com/hyc53?gl=KR&hl=ko#g/u
천익창( Ikchang Cheon) 010-8790-7776,
E-mail: hyc53@dreamwiz.com
2011년 5월 26일 목요일
2011년 5월 23일 월요일
천익창이 본 이왕직 아악부 마지막 악기장 강상기 전, 후 한국의 악기장
천익창이 본 이왕직 아악부 마지막 악기장 강상기 전, 후 한국의 악기장
지난번에 발표한 "천익창의 일제시대 가야금 이야기" 발표에 이어 일제시대 전(조선시대), 후 한국의 국악기가 어떻게 변화되고 누구에 의해 만들어 지고 있는지 소유자, 악기장을 중심으로 살펴 보기로 한다.
탁영금(濯纓琴, 조선 성종 21년 1490) 탁영 김일손(濯纓 金馹孫 1464~1498)의 거문고, 보물 제957호 앞면
탁영금(濯纓琴, 조선 성종 21년 1490) 탁영 김일손(濯纓 金馹孫 1464~1498)의 거문고, 보물 제957호 뒤면
옥동 이서의 거문고(1662~1723)
출처가 분명한 거문고 오른쪽부터 강포 류홍원(영조 2년 1726), 병와 이형상(1653~1733), 석탄 이신의(조선 광해군 10년 1618), 고산 윤선도(조선)
석천 전일상(石泉 田日祥 1700~1753)의 가야금 풍류그림(석천 한류도 조선 영조 24년, 1748년)
흥선대원군 이하응(興宣大院君 李昰應 1829~1898)풍류방 가야금
이미 이전이야기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일제시대 궁중의 악사들(이왕직 아악부)은 이전 시기에 비해 그 숫자가 현격히 줄어 들었으며 악사가 줄어 들었다는 것은 새롭게 악기가 제작될 필요성이 현격히 줄어들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그 시기에 탄생한 기방가야금(산조가야금)에서 보여지는것 처럼 민족 의식을 갖고 있는 악기 제작자나 연주자라면 자부심이나 긍지에 커다란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일예로 일제시기 제작된 산조가야금이나 이왕직아악부 악기들에는 이전에 흔하게 볼수 있는 제작자나 연주자의 낙관을 확인 할 수 없다. 이와 같이 제작자의 낙관을 볼 수 없는 것이 라든가 이시기 마지막 이왕직아악부 마지막 악기장 이었던 강상기의 제자가 없이 맥이 끊어졌든 사실이 악기나 음악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있지 않았음을 반증 한다
이전시기 흔히 볼 수 있는 낙관을 확인할 수 없는 이왕직아악부 가야금
이전시기 흔히 볼 수 있는 낙관을 확인 할 수 없는 이왕직 아악부 거문고
천익창 소장, 풍류가야금, 일본도, 일제시대(1910~1945) 산조 가야금, 일제후기 절금(折琴)
천익창 소장, 일제시대(1910~1945) 산조 가야금, 일제후기 절금(折琴)
천익창의 일제시대 가야금이야기 관련자료 바로보기:
http://blog.naver.com/hyc53/50097539880
이왕직 아악부(李王職雅樂部) 마지막 악기장(樂器匠) 강상기(康相騎) 1966년 사망 후 공용전속악기장의 맥은 끊어졌으나 악기 제작기능을 가진 제작자 들은 김광주, 김붕기, 김현칠, 김종영, 최태진, 김희곤, 염남기, 양춘엽, 박종태, 이영수, 정수웅, 박균석, 지방에 설재수, 원국진 ....등 이 있었으며 이시기 서양문화가 물밀듯 들어온 시기라 국악계에도 변화의 시도가 있었는데 그 예로 이 시기 제작된 변형국악기를 통하여 그 시대의 일면을 볼 수 있을 듯하다
1967년경 제작된 변형국악기들
기타의 울림통을 모방한 변형 국악기 가야금(위 악기는 국립국악원에서 개량국악기로 전시된 일도 있음)
서양 현악기의 공명홈을 모방한 변형 국악기 거문고(위 악기는 국립국악원에서 개량국악기로 전시된 일도 있음)
상판에 여러 개의 공명홈을 만든 변형국악기 아쟁(위 악기는 국립국악원에서 개량국악기로 전시된 일도 있음)
나발모양의 공명홈을 만든 변형국악기 해금(위 악기는 국립국악원에서 개량국악기로 전시된 일도 있음)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와 같은 악기들은 2011년 현재 사용되지 않고 있는 악기들이며, 특징이라면 악기에서 보듯 서양악기에 모방형태를 띠고 민족 악기로서 자부심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이후 1970년대 초 부터 문화재관리국은 위에 지적된 사람중 몇사람을 선정하여 무형문화재 악기 기능보유자로 지정하였다.
이중 김광주는 1971년 국가지정 제 42호 악기장 기능 보유자가 되었고. 이영수는 1991년 중요무형문화재 42호 악기기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1984년 4월 김광주가 사망후 그의 제자중 고흥곤이 1997년 스승의 뒤를 이어 중요무형문화재 42호 악기기능보유자 지정되었다
김광주(金廣胄,1906~1985, 부친 김명칠:金明七)가 1961년 전주에서 상경한 후 1971년 무형문화재 42호 악기장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었으며 필자(천익창)가 1973년 종암동거주 시절 종암극장, 종암 파출소 근처 주택가에서 가야금을 위주로 소규모 악기를 제작했으며 70년대 후반에는 창신동 바위 절벽아래에서 악기를 제작하였다,
1970년대 후반 김광주의 제자중 최세춘, 고흥곤, 최태귀 등과 함께 가야금을 제작하든 절벽아래
창신동 바위 절벽아래 가야금을 제작하기 위해 오동나무를 건조하는 모습
이시기 필자(천익창)는 김광주선생께 산조 가야금 보다 조금 작은 가야금을 주문하였으며 그 악기를 새롭게 개조(개량)하여 사용하였다. 김광주선생 제작의 가야금의 특징이라면 가야금 뒤판의 결(무늬)을 살린 화려함이 특징이었다.
필자(천익창) 소장의 김광주선생 제작의 가야금의 특징이라면 가야금 뒤판의 결(무늬)을 살려 화려함이 특징이었다.
김광주가 사망(1984년 4월) 하기 전 창신동 절벽아래 악기제작소, 2011년 현재 김광주의 제자중 최세춘에 의해 운영
최세춘 가야금의 특징 스승 김광주처럼 악기 뒤판에 무늬를 살린 것이 특징
김광주 제자중 최세춘(1947~ ) 이춘희(1955~ ) 부부 악기제작
김광주 제자중 고흥곤(1951~ )1997년 중요무형문화재 42호 악기기능보유자 지정, 가야금 화려한 금박 무늬가 특징
김광주 제자중 최태귀 화려한 자개장식이 특징
김붕기 김광주, 제작기술을 이어받은 이영수(1926~ )1954년 김붕기 악기제작사사 1991년 중요무형문화재 42호 악기기능보유자 지정, 제자에는 이동원, 양해철, 조정삼, 박성기, 김두향 등등이 있다
국악기 제작소가 대부분 그렇듯이 의도적으로 찾지 않고 우연히 볼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
조정삼대표 성음 국악사, 창덕궁앞 골목에 위치해 찾아가지 않는다면 쉽게 볼 수 없는 위치에 있음
백옥기 김광주 김붕기에게 가야금 제작 기술을 전수받은 조정삼(1940~ )은 2011현재 양평거주 하며 1970년대 전주에서 상경 그동안 여러 제자를 두었는데 전주에 고수환 최동식, 광주에 이준수(광일 국악기, 김광주 전수), 서울에 조대석, 김두향, 조경석(수원) 조범석(세종국악기대표 숙부) 조문석(청주) 충북 영동에 조준석(전북남원출신 조정삼의 조카, 1977년 12월 조대석 국악기 제작 입문 )등이 있다.
조정삼의 제자(처남), 42년째 가야금 제작에 몰두한 김두향(1956~ )
2011년 현재 한국의 악기장의 흐름
김명칠에 이어진 김광주(전라남도 보성:寶城 생, 주로 전주에서 활동, 1961년 상경, 1984년 4월 사망)의 제자들 최태진(崔泰珍, 최태순, 1941~ ), 최태일, 이춘봉, 김복곤, 최세춘. 고흥곤(高興坤)· 최태귀 등등...
김붕기(김학기)에 이어진 이영수 제자들
이동원, 양해철, 조정삼, 박성기, 김두향 등등...
백옥기 김광주 김붕기에 이어진 조정삼 제자들
전주에 고수환 최동식, 광주에 이준수(광일 국악기, 김광주 전수), 서울에 조대석, 김두향, 조경석(수원) 조범석(세종국악기대표 숙부) 조문석(청주) 충북 영동에 조준석(전북남원출신 조정삼의 조카, 1977년 12월 조대석 국악기 제작 입문 )등등...
일제시대 이왕직아악부 마지막 악기장 이었던 강상기의 맥은 끊어 졌으나 전주에는 김명칠이 있었고 정읍에는 김붕기(김학기)가 있었다.
광복후 김명칠의 기법은 그의 아들 김광주에 이어졌고, 1961년 서울로 옮겨 여러 제자를 가르치며, 71년 국가지정 제 42호 악기장 기능 보유자로 활동하다 1984년 4월 타계했다.
이영수는 정읍 김붕기의 기능을 받아 전북문화재로 지정되었으나 김광주의 기능도 전수받았고, 2011년 현재 악기 공방과 거주지는 한남동에 있다
* 악기 제작자들은 한사람의 스승 밑에 꾸준히 기능을 전수받아 활동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여기저기 몇 사람의 스승 밑에 전수를 받은 전수자들도 있어 편의상 일일이 스승을 열거하지 못하였으며. 현재 위에 소개된 많은 국악기(현악기 중심) 제작자들을 스승으로 두고 아직 알려지지 않은 많은 제자들이 있으며, 거론된 숫자 이상으로 많은 인원이 악기 제작에 참여하고 있다.
■ 천익창 경력및 활동
http://iboard2.superboard.com/board.cgi?db=28_dwhyc53noti251&idx=8&page=8
유튜브에 개설된 천익창의 동영상 사이트
http://www.youtube.com/hyc53#p/u
http://www.youtube.com/hyc53?gl=KR&hl=ko#g/u
천익창( Ikchang Cheon) 010-8790-7776,
E-mail: hyc53@dreamwiz.com
지난번에 발표한 "천익창의 일제시대 가야금 이야기" 발표에 이어 일제시대 전(조선시대), 후 한국의 국악기가 어떻게 변화되고 누구에 의해 만들어 지고 있는지 소유자, 악기장을 중심으로 살펴 보기로 한다.
탁영금(濯纓琴, 조선 성종 21년 1490) 탁영 김일손(濯纓 金馹孫 1464~1498)의 거문고, 보물 제957호 앞면
탁영금(濯纓琴, 조선 성종 21년 1490) 탁영 김일손(濯纓 金馹孫 1464~1498)의 거문고, 보물 제957호 뒤면
옥동 이서의 거문고(1662~1723)
출처가 분명한 거문고 오른쪽부터 강포 류홍원(영조 2년 1726), 병와 이형상(1653~1733), 석탄 이신의(조선 광해군 10년 1618), 고산 윤선도(조선)
석천 전일상(石泉 田日祥 1700~1753)의 가야금 풍류그림(석천 한류도 조선 영조 24년, 1748년)
흥선대원군 이하응(興宣大院君 李昰應 1829~1898)풍류방 가야금
이미 이전이야기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일제시대 궁중의 악사들(이왕직 아악부)은 이전 시기에 비해 그 숫자가 현격히 줄어 들었으며 악사가 줄어 들었다는 것은 새롭게 악기가 제작될 필요성이 현격히 줄어들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그 시기에 탄생한 기방가야금(산조가야금)에서 보여지는것 처럼 민족 의식을 갖고 있는 악기 제작자나 연주자라면 자부심이나 긍지에 커다란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일예로 일제시기 제작된 산조가야금이나 이왕직아악부 악기들에는 이전에 흔하게 볼수 있는 제작자나 연주자의 낙관을 확인 할 수 없다. 이와 같이 제작자의 낙관을 볼 수 없는 것이 라든가 이시기 마지막 이왕직아악부 마지막 악기장 이었던 강상기의 제자가 없이 맥이 끊어졌든 사실이 악기나 음악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있지 않았음을 반증 한다
이전시기 흔히 볼 수 있는 낙관을 확인할 수 없는 이왕직아악부 가야금
이전시기 흔히 볼 수 있는 낙관을 확인 할 수 없는 이왕직 아악부 거문고
천익창 소장, 풍류가야금, 일본도, 일제시대(1910~1945) 산조 가야금, 일제후기 절금(折琴)
천익창 소장, 일제시대(1910~1945) 산조 가야금, 일제후기 절금(折琴)
천익창의 일제시대 가야금이야기 관련자료 바로보기:
http://blog.naver.com/hyc53/50097539880
이왕직 아악부(李王職雅樂部) 마지막 악기장(樂器匠) 강상기(康相騎) 1966년 사망 후 공용전속악기장의 맥은 끊어졌으나 악기 제작기능을 가진 제작자 들은 김광주, 김붕기, 김현칠, 김종영, 최태진, 김희곤, 염남기, 양춘엽, 박종태, 이영수, 정수웅, 박균석, 지방에 설재수, 원국진 ....등 이 있었으며 이시기 서양문화가 물밀듯 들어온 시기라 국악계에도 변화의 시도가 있었는데 그 예로 이 시기 제작된 변형국악기를 통하여 그 시대의 일면을 볼 수 있을 듯하다
1967년경 제작된 변형국악기들
기타의 울림통을 모방한 변형 국악기 가야금(위 악기는 국립국악원에서 개량국악기로 전시된 일도 있음)
서양 현악기의 공명홈을 모방한 변형 국악기 거문고(위 악기는 국립국악원에서 개량국악기로 전시된 일도 있음)
상판에 여러 개의 공명홈을 만든 변형국악기 아쟁(위 악기는 국립국악원에서 개량국악기로 전시된 일도 있음)
나발모양의 공명홈을 만든 변형국악기 해금(위 악기는 국립국악원에서 개량국악기로 전시된 일도 있음)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와 같은 악기들은 2011년 현재 사용되지 않고 있는 악기들이며, 특징이라면 악기에서 보듯 서양악기에 모방형태를 띠고 민족 악기로서 자부심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이후 1970년대 초 부터 문화재관리국은 위에 지적된 사람중 몇사람을 선정하여 무형문화재 악기 기능보유자로 지정하였다.
이중 김광주는 1971년 국가지정 제 42호 악기장 기능 보유자가 되었고. 이영수는 1991년 중요무형문화재 42호 악기기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1984년 4월 김광주가 사망후 그의 제자중 고흥곤이 1997년 스승의 뒤를 이어 중요무형문화재 42호 악기기능보유자 지정되었다
김광주(金廣胄,1906~1985, 부친 김명칠:金明七)가 1961년 전주에서 상경한 후 1971년 무형문화재 42호 악기장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었으며 필자(천익창)가 1973년 종암동거주 시절 종암극장, 종암 파출소 근처 주택가에서 가야금을 위주로 소규모 악기를 제작했으며 70년대 후반에는 창신동 바위 절벽아래에서 악기를 제작하였다,
1970년대 후반 김광주의 제자중 최세춘, 고흥곤, 최태귀 등과 함께 가야금을 제작하든 절벽아래
창신동 바위 절벽아래 가야금을 제작하기 위해 오동나무를 건조하는 모습
이시기 필자(천익창)는 김광주선생께 산조 가야금 보다 조금 작은 가야금을 주문하였으며 그 악기를 새롭게 개조(개량)하여 사용하였다. 김광주선생 제작의 가야금의 특징이라면 가야금 뒤판의 결(무늬)을 살린 화려함이 특징이었다.
필자(천익창) 소장의 김광주선생 제작의 가야금의 특징이라면 가야금 뒤판의 결(무늬)을 살려 화려함이 특징이었다.
김광주가 사망(1984년 4월) 하기 전 창신동 절벽아래 악기제작소, 2011년 현재 김광주의 제자중 최세춘에 의해 운영
최세춘 가야금의 특징 스승 김광주처럼 악기 뒤판에 무늬를 살린 것이 특징
김광주 제자중 최세춘(1947~ ) 이춘희(1955~ ) 부부 악기제작
김광주 제자중 고흥곤(1951~ )1997년 중요무형문화재 42호 악기기능보유자 지정, 가야금 화려한 금박 무늬가 특징
김광주 제자중 최태귀 화려한 자개장식이 특징
김붕기 김광주, 제작기술을 이어받은 이영수(1926~ )1954년 김붕기 악기제작사사 1991년 중요무형문화재 42호 악기기능보유자 지정, 제자에는 이동원, 양해철, 조정삼, 박성기, 김두향 등등이 있다
국악기 제작소가 대부분 그렇듯이 의도적으로 찾지 않고 우연히 볼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
조정삼대표 성음 국악사, 창덕궁앞 골목에 위치해 찾아가지 않는다면 쉽게 볼 수 없는 위치에 있음
백옥기 김광주 김붕기에게 가야금 제작 기술을 전수받은 조정삼(1940~ )은 2011현재 양평거주 하며 1970년대 전주에서 상경 그동안 여러 제자를 두었는데 전주에 고수환 최동식, 광주에 이준수(광일 국악기, 김광주 전수), 서울에 조대석, 김두향, 조경석(수원) 조범석(세종국악기대표 숙부) 조문석(청주) 충북 영동에 조준석(전북남원출신 조정삼의 조카, 1977년 12월 조대석 국악기 제작 입문 )등이 있다.
조정삼의 제자(처남), 42년째 가야금 제작에 몰두한 김두향(1956~ )
2011년 현재 한국의 악기장의 흐름
김명칠에 이어진 김광주(전라남도 보성:寶城 생, 주로 전주에서 활동, 1961년 상경, 1984년 4월 사망)의 제자들 최태진(崔泰珍, 최태순, 1941~ ), 최태일, 이춘봉, 김복곤, 최세춘. 고흥곤(高興坤)· 최태귀 등등...
김붕기(김학기)에 이어진 이영수 제자들
이동원, 양해철, 조정삼, 박성기, 김두향 등등...
백옥기 김광주 김붕기에 이어진 조정삼 제자들
전주에 고수환 최동식, 광주에 이준수(광일 국악기, 김광주 전수), 서울에 조대석, 김두향, 조경석(수원) 조범석(세종국악기대표 숙부) 조문석(청주) 충북 영동에 조준석(전북남원출신 조정삼의 조카, 1977년 12월 조대석 국악기 제작 입문 )등등...
일제시대 이왕직아악부 마지막 악기장 이었던 강상기의 맥은 끊어 졌으나 전주에는 김명칠이 있었고 정읍에는 김붕기(김학기)가 있었다.
광복후 김명칠의 기법은 그의 아들 김광주에 이어졌고, 1961년 서울로 옮겨 여러 제자를 가르치며, 71년 국가지정 제 42호 악기장 기능 보유자로 활동하다 1984년 4월 타계했다.
이영수는 정읍 김붕기의 기능을 받아 전북문화재로 지정되었으나 김광주의 기능도 전수받았고, 2011년 현재 악기 공방과 거주지는 한남동에 있다
* 악기 제작자들은 한사람의 스승 밑에 꾸준히 기능을 전수받아 활동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여기저기 몇 사람의 스승 밑에 전수를 받은 전수자들도 있어 편의상 일일이 스승을 열거하지 못하였으며. 현재 위에 소개된 많은 국악기(현악기 중심) 제작자들을 스승으로 두고 아직 알려지지 않은 많은 제자들이 있으며, 거론된 숫자 이상으로 많은 인원이 악기 제작에 참여하고 있다.
■ 천익창 경력및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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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에 개설된 천익창의 동영상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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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익창( Ikchang Cheon) 010-8790-77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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