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월 29일 일요일

일제시대 산조가야금 산조음악 탄생, 전후시기 조선에 있었던 악기들

일제시대 산조가야금 산조음악 탄생,
전후시기 조선에 있었던 악기들



석천 전일상(石泉 田日祥 1700~1753) 풍류가야금이 있는 그림



김홍도(1745~ ?) 무동, 북 장구, 피리2, 대금, 해금이 있는 그림


김홍도(1745~ ?)대금과 거문고가 있는 그림




신윤복(1758~? ) 풍류가야금이 있는 그림




신윤복(1758~? ) 거문고가 있는 그림




신윤복(1758~? ) 생황이 있는 그림




신윤복(1758~? )대금, 해금 거문고가 있는 그림




이형록(1808~ ? 조선시대 ) 거문고가 있는 그림




조선시대 거문고가 있는 그림



조선시대 후기 어린 기생들의 수업을 받는 모습 왼쪽부터 장구, 거문고 양금이 있는 사진




조선시대 후기 기생들의 수업을 받는 모습 왼쪽부터 양금, 거문고, 장구, 거문고가 있는 사진




조선시대 후기 기생들의 수업을 받는 모습 왼쪽부터 장구, 양금, 거문고가 있는 사진




조선시대 후기 악사들 왼쪽부터 피리, 해금, 거문고, 양금이 있는 사진



일제시대 초기에 촬영된 5명의 어린 기생들과 두대의 거문고



일제시대 초기에 촬영된 장구, 징, 부채 춤을 추는 여인과 거문고 타는 여인




흥선대원군(이하응 1820~1898) 풍류가야금(법금, 정악)




김창조 (1856~1919) 풍류가야금(법금, 정악)





일제시대 초기 1910년대



산조가야금 산조음악 탄생



일제시대 강제병합 직후 일제수뇌부 기념촬영(1916)




1915년경 촬영. 1910년 한일 합방후 산조가야금이 등장한 초기 사진으로 추정,



일제시대 일제가 만든 산조가야금을 기방에 전달하며 기념으로 촬영한 사진으로 추정,
왼쪽부터 첫번째 단발을 한 조선인, 기방의 책임자 이거나 이시기 단발을 한 것으로 보아 친일 하수인으로 추정,

두번째 책상다리가 어색한 일본인 관리나 악기제작을 담당한 교도관(간수) 혹은 제작에 관계한 자로 추정, 나머지 3명의 기생과 시범연주를 하는 2명의 기생 산조가야금 양금 시범연주

* 이 사진에서 보여지는 산조가야금 연주자의 자세를 살펴볼때 아래에 소개되는 사진과 비교하지 않을수 없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왼손의 모습이 거문고 연주 모습과 비슷하며, 표정 또한 시선이 왼쪽손으로 간것으로 보아 생소한 악기에 대한 호기심을 보이는 모습으로 보여진다.


1910년대 초 까지만 하여도 조선반도에 일반적으로 사용된 악기는 위에 열거한 사진에서 보는 바와같이 거문고, 양금, 해금, 대금, 피리, 징, 장구, 풍류가야금, 생황 등의 악기들이 였으나 1910년 일제 강점기가 시작된 이후 부터 엽서를 비롯한 각종 홍보 매체에 일제가 만든 산조가야금이 등장하며 일제문화의 대표 주류문화로 등장 하였다.


일제시대 일제문화의 상징 산조가야금 연주 자세가 숙련된 기생 1



일제시대 일제문화 상징 산조가야금 연주 자세가 숙련된 기생 2



일제시대 일제문화 상징 산조가야금 연주 자세가 숙련된 기생 3



일제시대 일제문화 상징 산조가야금이 등장한 악단

일제가 제작한 산조가야금은 엽서를 비롯한 각종 홍보 매체에 등장하지만 이전 시기에 흔하게 보여 졌던 거문고가 보이지 않는것은 일제는 거문고가 조선인들의 사상을 반영하는 악기로 규정 된 듯하고 필자(천익창)의 이전에 발표한 글에서 보는 바와 같이 김광주가 거문고를 제작 하였다고 하여 사상범으로 몰았다는 것은 일제는 조선악기의 사상적 뿌리를 거문고에 둔 듯 하다.

일제는 조선의 사상을 말살하고 일제가 만든 산조가야금을 보급한 것은 일제 식민지를 고착화 하기위한 방법으로 활용된 듯 하다.



일제시대 일제문화 상징 산조가야금 변화 과정 왼쪽부터 일제시대 초기제작된 산조가야금, 두번째 문제점이 개선된 산조가야금, 세번째 일제후기 절단된 산조가야금(절금), 2012년 현재 보편적 산조가야금.

일제는 일제강점기 그들이 만든 산조가야금을 한반도에 뿌리 내리게 하고 1945년 일제가 패망 한반도에서 철수한 후에도 한국인 스스로 그것을 한국전통문화로 둔갑하게 하여 중요무형문화재, 대학교수, 감독등 한국문화의 기득권 세력으로 우뚝서게 한것은 침략자의 야욕이 성공할수 있는 사례로 볼수 있기에 그들의 침략은 일정부분 성공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국립국악원 국악박물관 소장, 일제시대 민간에서 제작된 산조가야금과 북한의 21현 개량가야금



(좌)일제시대 간혹 민간에서 일제의 산조가야금을 모방한 가야금이 나오기도 하였다. 특징이라면 세련됨이 부족 하였고, 일제를 상징하는 문양이나 나전칠기 자개장식의 화려함이 부족 하였으며, 부들 메듭 공(孔)이 24공(孔)이 아닌 이전 현악기 제작 모양과 같은 12공(孔)을 사용하는 특징을 가지며, 규격이 통일되지 못하여 기생들에게 인기를 얻지 못하고 주류악기에 밀리어 지속적 발전을 하지 못하였다.

(우)북한의 21현 개량가야금 1990년 10.14~24 범민족통일음악회 시기 북한으로 부터 기증받은 여러 악기중 하나


일제시대 일제문화의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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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탄생한 산조 가야금 산조음악과 한국의 악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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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일본인에 의해 탄생한 산조 가야금 산조음악 감상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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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월 21일 토요일

일제시대 탄생한 산조 가야금 산조음악과 한국의 악기장

일제시대 탄생한 산조 가야금 산조음악과 한국의 악기장


일제시대 일제는 우리전통문화 말살정책을 펴왔으나 그들이 고안하고 보급한 기방문화의 상징 산조가야금과 가야금 산조 음악은 확실하게 뿌리내려 현재 한국전통문화의 대표문화로 자리잡게 되었다

일제시대 일제는 조선악기를 만들면 사상법으로 몰아 자유로운 악기 제작 활동을 탄압 방해 하였다.

하지만 일제에 의해 만들어진 산조 가야금 산조 음악은 일제시기 기방문화로 정점에 달하였으며 2012년 현재까지도 여러지역에서 일제시기 제작된 산조가야금이 발견되며, 그 시기에 생겨난 여러 연주자들에 의해 그 맥이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기득권 주류문화로 튼튼히 전승되고 있다.



일제시대 일본인에 의해 만들어진 산조가야금과 2012년 현재까지도 사용되고있는 산조가야금


지난 1979.12. 8 일자 경향신문 "대를 잇는다, 보람에 사는 외길인생, 악기장 김광주옹~전수자 최세춘씨"에 따르면 한국최초의 악기장으로 중요무형문화재 42호로 인정(1971)받게 된 김광주 악기장의 악기를 처음 접하며 악기장으로 탄생되는 과정을 알수 있는 의미있는 기사가 있어 이 기회에 소개 하기로 한다.


(경향신문 1979.12. 8일자 " 대를 잇는다, 보람에 사는 외길인생(48) 악기장 김광주옹~전수자 최세춘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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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가 고향인 김옹은 27살이 될때까지 장가도 못가고 목공일로 생계를 잇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자전거를 타고 심부름을 가다가 웬 노인이 문을 열어놓고 거문고를 타고 있는 것을 보고는 돌부처 처럼 그 자리에 우뚝 섰다.

"참 소리가 듣기 좋더군, 물론 그때는 그 악기가 거문고인지 몰랐지, 도대체 처음 보는 것이 었으니까"

그일이 인연이 되어 낮에는 목공일을 하고 밤이면 그 노인을 찾아가 처음에는 탄주법을 배웠으나 곧 직업의식이 발동 않을수 없었다.

"만들어 보고 싶다"고 김옹이 그할아버지에게 간청했으나 자신도 어떻게 만드는지 모르니 안될것이라고 잘라 말했지만 김옹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거문고를 놓고 오동나무를 잘라다가 목공일하던 솜씨로 나무를 주무르기 1달만에 대강 흉내는 냈으나 소리가 제대로 날리 없었다. 그러기를 1년여, 나무와의 씨름에서 김옹은 드디어 승리할수 있었다. 고운 소리를 내는 거문고를 만들어 냈던 것이다.

그러나 기쁨도 잠깐이었어 일본형사가 조선 악기를 만든다고 사상범으로 몰아세우더구먼 할수없이 눈을 피해 방공호로 숨어들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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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1979.12. 8일자 " 대를 잇는다, 보람에 사는 외길인생(48) 악기장 김광주옹~전수자 최세춘씨" 중에서)


김광주(1906~1984. 4)가 한국최초의 중요무형문화재 제42호 악기장 기능보유자로 인정받게 된 것은 1971년 그가 악기를 처음 알고 제작한 1933년 일제시대 후반기 그의 나이 27세때의 일이며 김광주 나이 39세때인1945년에 해방 되었고 악기 제작한지 38년 만에 중요무형문화재 42호 악기장이 되었다.

1984년 4월 김광주가 사망후 그의 제자들에 의해 전통 국악기중 현악기들이 많은수 만들어 지고 있으며 중요무형문화재가 된 사람을 포함해 전국에 걸처 많은수 악기 제작에 참여하고 있다.

김광주의 제자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악기 제작자들이 산조가야금을 역사가 깊은 우리의 전통악기로 알고 있는 것은 일제의 암흑기를 거치면서 예상치 않든 혼란스런 해방을 맞이하는 사이 대부분 생계가 다급한 백성들은 전통이 무엇인지 관심을 두지 않든시기에 마지막 이왕직아악부 몇남지 않은 예인들에 의해 새로운 조직이 형성 되어 그들에 의해 비판없이 정착되었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 발발시기 일본 천황을 찬양하며, 조선의 젊은 청년들을 전쟁터로 몰아넣은 황화만년지곡을 만들고 발표한 친일 인사인 김기수를 비롯 이왕직아악부 마지막 악사들에 의해 국립국악원이 생기고 국악사 양성소(현 국립국악고등학교)가 생겨나니 이전에 기방의 예인들 또한 그들과 합류하여 한국의 전통 주류문화로 발판을 다지게 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였을 것이다.




일장기를 걸고 일본천황을 찬양하는 이왕직아악부(李王職雅樂部)의 김기수작곡의 황화만년지곡(皇化萬年之曲)연주(1940. 11. 9 부민관, 일본기원 2600년을 기념하는 봉축연)


이제 세월이 흘러 일제강점기에 일제에 의해 생겨난 문화를 일제문화니 한국의 전통이니 따지냐고 할수도 있겠으나 모르고 추종하는 것과 알고 행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것이라 진솔하게 지적하는 것이다.

필자는 필자의 주장이 잘몰라서, 잘못된 주장이길 바라며,

악기 제작자나 가야금 산조 전수자들 누구든 국악계 종사자들의 또 다른 이견(異見)이 있길 기대하며, 산조가야금, 산조음악이 필자의 주장보다 더 훨씬 오래된 한반도 전통문화라는 사실을 증거를 제시해 밝혀주길 바란다.

또한 지금껏 그래왔고 지금처럼 산조가야금 산조음악이 마치 오래된 전통인양 막연한 심증으로 국민을 기만하는 억지 학문으로 지속되지 않길 바란다.



친일매국노 주요인물 109명 매국행적과 약력 중 음악부분 김기수

*김기수(金琪洙·光山哲三, 국악 작곡)-1940년 11월 9일 일본기원 2600년을 기념하는 봉축연회에서 이왕직 아악부가 연주한 '황화만년지곡' 작곡. 이 곡은 이능화의 1939년 한문시에 곡을 붙여 일본기원 2600년 기념 공모 당선작, 국내 최초로 오선보로 작곡된 국악 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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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월 8일 일요일

일제강점기 일본인에 의해 탄생한 산조 가야금 산조음악 감상법

일제강점기 일본인에 의해 탄생한 산조 가야금 산조음악 감상법(이해하기)

필자는 가야금 산조 음악을 이해 하는데 많은 부담을 느끼는 젊은이 들과 많은 한국 사람들에게 좀더 가까이 이해 될수 있는, 이해에 도움이 될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 사실적 근거를 바탕으로 이글을 쓴다.

가야금산조 음악을 감상하기 위해선 음악뿐만 아니라 산조가야금과 가야금 산조 탄생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음악을 이해 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이미 이전에 발표한 글에서 밝힌 바와 같이 산조 가야금 탄생은 일제시대 일본인에 의해 서대문 형무소에서 제소자들에 의해 강제로 제작되어 기생들에게 공급된 것이라고 밝힌 바가 있다

그시기 전국에 산재한 일본인이 관할 통제하는 전국의 형무소에 지배계급의 일본인이 있었고 그들이 받는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기방이 있었다, 또한 기방에는 그들이 제공한 기방문화의 필수품인 산조가야금 또한 있었다.




일제강점기 전국 형무소 배치도(1936)

일제강점기 세계정복에 혈안이된 일본인들은 저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독립을 부르짖는 조선인을 살육과 탄압으로 일관 하였으며 그들이 남긴 흔적들은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에 보존, 복원중에 있으며, 탄압의 흔적은 전 국토에서 행하여 졌다.

그중 일부 복원된 고문을 위한 고문 기구들은 정신을 혼미하게 하고 사지를 얼어 붙게 한다.


취조때 사용된 여러종류의 고문기구


한사람이 겨우 누울수 있는 정도의 똥통이 있는 독방과 4면에 쇠꼬챙이가 박힌 4각 박스 고문기구



벽관 고문

옴짝달싹할 수도 없이 좁은 공간에 사람을 감금하여 앉을수도 움직일 수도 없는 고통을 주엇던 고문도구 벽에 서 있는 관이라 하여 '벽관'이라 이름 붙여졌다.


지하독방

취조 후 옥사로 이동하기 전 감금했던 곳, 곳곳에서 들려오는 고통의 비명소리와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고문의 공포로 휩싸인 공간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지하독방에서도 독립운동가는 만세소리를 멈추지 않았고, 독립의 다짐을 되새겼다(서대문 형무소역사관)




민족의 빛 독립운동가 육성증언


...(여자들은)자궁에다 막대를 넣고 휘젓고..... 남자들은 성기에다 심을 박고 불지르는 거.... ...차라리 죽는 게 나았어 죽여 달라고 아우성을 치지 죽는게 낫거든 아픈것 보다 죽는 게 나아... (애국지사 이병희 증언중)


일제시대 서대문 형무소 독립운동가의 물고문


일제시대 서대문 형무소 독립운동을 한 여성들의 주리틀기 고문


사형장 담벼락과 바깥쪽 통곡의 미루나무 이 미루나무는 1923년 사형장 건립당시 식재되었다.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애국지사들이 마지막으로 이 나무를 붙잡고 조국의 독립을 이루지 못하고 생을 마감해야 하는 원통함을 눈물로 토해내며 통곡했다고 하여 '통곡의 미루나무'라고 이름 지어졌다.



한편, 사형장 안쪽에 같은 시기 식재된 미루나무가 있으나, 너무나 억울한 한이 많이 서려 잘 자라지 못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서대문형무소역사관)


사형장과 담벼락 안쪽의 미루나무



고문에 의한 고통보다 차라리 죽는 게 나아 저항없이 목숨을 버렸든 독립운동가들 일제시대 서대문 형무소 사형장과 모퉁이에 서 있는 작은 미루나무 너무나 억울한 한이 많이 서려 잘 자라지 못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일제강점기 서대문 형무소에서는 독립운동가들의 참혹한 고문의 현장이 있었으며 피비린네 나는 고문과 고통의 비명소리가 있었고, 억울한 죽음이 있었다.


이시기(일제강점기) 피해자의 고통은 말로 다 할수 없지만 가해자인 일본인들 또한 많은 스트레스에 시달렸을 것이다. 스트레스에 시달렸다면 그들은 그 스트레스를 무엇으로 풀었겠는가,


일제강점기 지배계층의 일본인 남성들은 무엇으로 스트레스를 해소 하였는가?

위에서 보는바와 같이 조선반도를 점령하고 세계정복을 꿈꾸는 일본인들의 야망은 많은 희생을 필요로하고 그들 스스로도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렸을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그로 인해 받는 스트레스를 무었으로 해소 하였는가,


모든 자연계, 동물의 세계에도 마찬가지 이지만 정복에 따른 수컷들의 일차적 보상은 섹스에 있다.


그들은 섹스로 많은 스트레스를 해소 하였다


일예로 전쟁터에 끌려다니며 희생당한 위안부들이 있으며 지배계층을 상대로한 기생들이 이었고 그 중심에 그들이 고안하고 제공한 기방문화의 대표 산조가야금이 있었다.



조선반도를 강점한 일제시대 일본인들에 의해 고안되어 기생들에게 보급된 산조 가야금을 연주하는 기생


일제시대 기생들은 조선인으로 격은 비애는 남달랐을 것이며, 한편 부를 축척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도 하였다,


축척된 자금은 후일 자신들의 명예회복에 일조를 하며, 무형문화재도 되고, 국공립교육기관 설립에 일조를 하기도 한다.



일제시대 일본인에 의해 만들어진 산조가야금 변화 과정


좌로부터, 첫번째 일제시대 초기제작된 산조가야금, 두번째 문제점이 개선되어 제작된 산조가야금, 세번째 일제시대 후기에 절단된 절금


좌로 네번째, 우측 첫번째 2011년 현재 가장 많이 보급된 일반적인 형태의 산조가야금, 일제의 흔적이 대부분 제거 되었으나 기본적인 형태는 변함이 없으며, 제작자에 따라 여러가지 문양의 도안을 사용하며, 소뼈, 자개, 금, 옥, 칠보등으로 장식을 하기도 한다.


이 시기 민간에서 가혹 일제의 산조가야금을 모방한 가야금이 나오기도 하였는데 특징이라면 세련됨이 부족 하였고, 일제를 상징하는 문양이나 나전칠기 자개장식의 화려함이 부족 하였으며, 부들 메듭 공(孔)이 24공(孔)이 아닌 이전 현악기 제작모양과 같은 12공(孔)을 사용하는 특징을 가지며, 기생들에게 인기를 얻지 못하고 주류악기에 밀리어 지속적 발전을 하지 못하였다.

일제시대 제작된 산조 가야금은 경성(서울)뿐만 아니라 그들이 설치한 전국형무소에 파견된 일본인 중심의 기방에 산조가야금이 있을수 있기때문에 아직도 파손되어 사라지지 않았다면 발견될수 있는가능성이 있으며 필자가 확인한 광주, 대전, 춘천에서 촬영한 산조가야금을 공개 한다



춘천지역에서 발견된 산조 가야금


대전지역에서 발견된 산조 가야금



광주지역에서 발견된 산조 가야금

일제강점기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독립운동가가 아니드라도 희희낙낙 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극소수 친일 매국 권력자나 부호가 아니라며, 기방에 출입할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대다수 일본 남성과 친일 매국 권력자들이 기방에서 그들은 무엇을 하였겠는가, 고상하게 한복 차려입고 가야금 산조연주를 30~60분동안 연주하는 것을 집중하여 감상 하였겠는가?


손톱 밑에 쇠꼬챙이를 찔러놓고 들어야 하는 비명소리, 사타구니에 지렛대를 끼워 넣고 주리를 틀며 들어야 하는 비명소리, 죽기가 억울해서 미루나무를 잡고 통곡을 하는 조선인들을 상대하는 조선반도에 주둔하는 일본 남성들의 일상 이였다면 그 스트레스는 아마도 정신병을 갖기에 부족함이 없었을 것이다


이들이 어떻게 스트레스를 해소 했는지 짐작이 어렵지 않다.


하루 종일 지옥같은 비명소리에서 벗어나 조선의 여인을 품에 끌어안고 조선의 여인이 들려주는 가야금 소리라면 그 소리가 생수같은 깊은 산속 천연약수 같은 소리가 아니였겠는가


그들이 느낀 쾌락을 상상하기가 쉽지 않다


오죽하면 줄줄이 복상사(腹上死)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는가,


일제시대 복상사(腹上死)관련기사 바로보기: http://www.sisapress.com/news/articleView.html?idxno=51953#


이글의 제목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 글은 가야금산조 이해 하는 법(감상법)이다,


과거로 돌아가 똑같은 환경을 재현하여 당시의 일본인이 되어 가야금 산조를 듣는 다면 생수같은 깊은 산속 천연약수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나,


그것을 재현 하기란 불가능 한 것이라 비명 소리라도 듣고 가야금 산조를 감상 한다면 조금 이나마 이해 하기가 쉽지 않을까 한다.


TV 드라마 혹은 영화나 음악중 죽을 듯한 비명 소리를 10분 이상 들을수 있다면 듣고 난후 가야금 산조 음악을 듣기를 추천한다.


천상의 소리, 생수 같은 깊은 산속 천연약수 같은 소리를 느낄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문화 예술을 이해 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경우 시대적 배경을 이해 함으로 이해에 도움이 될 수 있어 산조가야금과 가야금산조 음악의 탄생배경을 살펴 보았다.


일제시대 일제문화의 상징 산조가야금 관련자료 바로보기;

일제시대 일제문화의 상징 산조가야금 변천사

http://blog.naver.com/hyc53/50130126673


일제시대 조선인 탄압의 현장과 일제문화의 상징 산조가야금 http://blog.paran.com/hyc53/46215537


산조가야금, 천익창의 일제시기 가야금(문화)이야기 -연화- http://blog.daum.net/hyc53/14032019


한반도 현악기 역사 시대별자료 바로보기

조선시대 김창조 풍류가야금(정악, 법금)과 신라시대 신라금 바로보기; http://blog.daum.net/hyc53/14032020


한반도 철기시대 현악기 바로보기;
http://cafe.naver.com/hyc53/50

한반도 신석기 시대 현악기 바로보기;
http://cafe.naver.com/hyc53/43

한반도 신석기 시대 비봉리 현악기 바로보기;
http://kr.blog.yahoo.com/ehyc53/1127

천익창이 본 이왕직 아악부 마지막 악기장 강상기 전, 후 한국의 악기장 http://blog.naver.com/hyc53/50109827423


■ 천익창 경력및 활동
http://iboard2.superboard.com/board.cgi?db=28_dwhyc53noti251&idx=8&page=8

유튜브에 개설된 천익창의 동영상 사이트
http://www.youtube.com/hyc53#p/u
http://www.youtube.com/hyc53?gl=KR&hl=ko#g/u

천익창( Ikchang Cheon) 010-8790-7776, E-mail: hyc53@dreamw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