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6월 8일 수요일

개량 가야금을 열손가락으로 연주하는 선구자 천익창 인터뷰

2011, 5월 조모기자의 13개 서면질문(E-mail)에 대한 천익창의 서면답변(E-mail)



개량 가야금을 열손가락으로 연주하는 선구자 천익창씨(남. 61세)

세 손가락으로 연주를 하는 가야금을 두 대, 혹은 세 대의 가야금을 같이 놓고 열 손가락으로 자유자재 연주하고 또한 그의 개량 가야금중 창금은 연주 가능한 곡이 1천여곡이나 되어 현대판 우륵이라 불린다.


역사적 가치가 있는 고대악기를 복원하고 연주하여 , 없어진 유물을 재현하는 일도 하고 있는 그의 끊임 없는 도전은 계속된다.


1. 한국 최고에 도전하신 분야는 어떤 분야이고 구체적인 내용은?

우리나라 전통 가야금은 원래 열두 줄이다. 그리고 연주할 때는 기본적으로 오른손의 세 개의 손가락으로 연주를 한다. 왼손은 ‘농현’이라 하여 바이브레이션을 주는 기능을 한다. 그런데 나와 나의 아이는 열 손가락으로 서로 다른 재질과 음역을 가진 두 대(23현 1대와 25현 1대), 혹은 세 대의 가야금(저음, 중음, 고음의 12현가야금)을 같이 놓고 동시에 연주한다. 서로 다른 악기를 동시에 연주함으로써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어 내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낼 수 없는 놀라운 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이다.

내 연주는 우리나라 최초의 동서양음악의 융합이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크로스오버’음악이다. 나는 창금으로 팝, 가요, 클래식, 민요 등을 연주하는데 연주가능한 곡이 모두 합쳐 1천 여곡 이상 된다. 내가 연주자로서 활동한 것은 1973년부터 였는데, 공식적인 무대에서 연주를 하고 방송을 탄 것은 MBC 정동시절 1984년 2월19일 MBC 라디오 윤건호 연출의 '별이 빛나는 밤에' 출연 "천익창의 개량가야금" 소개였고, 1987년 12월 13일 세종문화회관에서 KBS주최로 열렸던 연주회였다.

그 때 연주회 제목이 <최초의 양/국악의 만남>이었는데, 나는 KBS양악 관현악단 협연으로 내가 직접 개량한 가야금(창금)을 가지고 ‘로망스’와 ‘새타령’을 협연 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날이 내 결혼식 날이었던 거다. 오전에 종로 서울예식장에서 식을 올리고 부랴부랴 세종문화회관으로 달려와서 리허설도 못하고 무대에 오르는 바람에 신혼여행도 못가고 그 날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천익창의 악기중 개량 국악기 앞에서부터 10현 개량아쟁, 48현 가야금(23+25), 전자가야금(창금)


2. 언제부터 악기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나?

태어난 곳은 경북 예천이고 학교공부는 안동에서 했다. 초등학교시절에 집에 하모니카가 있어서 불며 놀았고 또 그림을 잘 그려서 학교에서 상도 받고 했다. 그런데 살아생전에 아버지가 내가 그런 예능에 관심을 갖는 걸 아주 안 좋아 하셨다. 학교 미술선생님이 실제 풍경을 보고 그리라고 화판을 들고 안동 시내를 여기저기 돌아다니니 그 소문이 아버지 귀에까지 들어가서 그림은 그려오면 다 아궁이에 넣고 태워버렸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악기 연주이다. 연주는 증거가 남지 않으니까 이걸 하기로 한 것이다.

중학교 1학년 때 안동에서 처음으로 황병창 선생님에게 바이올린을 배웠다. 기타는 조동욱이라는 선생님을 학원에 쫓아다니면서 배웠고 피아노는 하도 배운 선생님이 많아서 성함을 다 기억 못한다. 안동에 유명음대를 나온 선생님이 오면 모두 다 찾아가서 배웠으니까. 모두 다 기억 할 수 없는 정도다.

가정형편이 넉넉한 것도 아니었는데 집에 방이 여러 개라서 어머니가 그 방을 세를 주어서 나온 그 돈을 내가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다 타다가 레슨비로 쓴 거다. 그렇게 다녔어도 형제들한테 들킬까봐 얼마나 조심했는지 모른다. 아버지 돌아가신 다음에는 큰 형님이 참 무서운 존재였다.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내가 음악 배우고 다니는 걸 학교에서건 집에서건 아무도 몰랐다.

그러다가 이렇게 그냥 졸업하면 너무 억울할 거 같더라. 우리학교가 미션스쿨이었는데 한 번은 교감선생님한테 “내가 피아노를 배우는데 내 주변에는 이걸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러니 졸업하기 전에 교회에 기도할 때 피아노 연주 한 번만 하게 해 달라”라고 부탁을 했다. 그래서 학교에서 딱 한 번 피아노를 치게 되었는데 그 날 선생님이고 친구들이고 다들 깜짝 놀랐다. “뭐 저런 놈이 다 있냐”면서..


3. 서양악기보다 국악기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큰형님이 내게 고등학교 졸업하면 교대를 가야 한다고 하셨는데 나는 오직 음악을 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예비고사 날도 시험장에 가지 않았다.(당시엔 음악과는 예비고사 치를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시험 날에 내가 학교에 가지 않자 집안이 발칵 뒤집어졌다. 이유를 묻는데 그렇다고 내가 음악하고 싶다는 말을 할 용기는 도저히 나지 않아서 그냥 대뜸 ‘졸업하면 집을 나가겠다’고 말해버렸다. 그래서 이런저런 이유로 졸업 후 짐을 싸가지고 약 40일간 봉정사 영선암이라는 암자에서 혼자 있게 되었다. 거기에서 꿈속에 많은 영감을 받았다.

예전에 그렇게 좋아했던 피아노 바이올린 같은 서양악기 소리가 하루아침에 전혀 다른 소리로 들리는 경험을 했다. 꿈에서 들어 그 감동적인 소리를 찾아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어느 날 산에서 내려온 후에 우연히 약장사들이 하는 공연을 보게 되었는데, 예전엔 약장사들이 약을 팔 때 가설무대를 만들어 놓고 창 같은 공연을 하고 했었다. 그런데 거기서 아쟁이라는 악기를 처음 만났다.

그 소리가 꿈에서 들은 그 소리하고 너무도 비슷해 그걸 배우려고 악사한테 어디가면 배울 수 있냐고 연주하는 도중에 다그쳐 물었다. 악사가 ‘서울! 서울!’ 했는데 그 소리를 듣고 그 길로 바로 서울로 올라온 거였다. 그렇게 꿈 속에서 들은 그 음악을 재현하기 위해 오늘까지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살고 있다.


4. 지금까지 이룩하신 성과를 간략히 말씀해주신다면?

내게 공식적인 타이틀이나 남들에게 인정받은 업적은 없다. 그런데 나나 내 아이가 연주한 동영상을 찍어서 웹사이트에 올리면 비난 보다는 좋아하고 칭찬하는 덧글이 많다. 2007년경 나의 아이가 인터넷에 발표한 동영상에 수많은 네티즌들의 올린 감동의 글을 보았고(특히 48현 가야금 캐논), 또한 그로 하여 제1회 대한민국 UCC동영상 대상을 수상한 것으로 보아 대다수의 사람들은 좋아했든 것으로 기억한다.

안타까운 것은 그렇게 많은 분들이 좋아해 준 것에도 불구하고 우리부자(父子)에게 실질적인 삶에 도움을 줄 수 있고, 도움이 될 만한 사람들의 관심으로부터는 철저하게 외면당해온 사실이다. 인정해줌으로 써 더 한 발 나아갈 수 있는 영향력 있는 사람들은 우리를 인정해 주지 않으니 대다수 국민이 우리를 좋아한다고 해도 실제로 삶의 기반이나 연구가 진척될 수 있는 바탕이 없는 셈이다.

다만, 나 스스로 나를 표현 한다면 60평생 음악 이외의 무엇을 해본 일이 없고, 또한 할 줄 아는 것이 없지만 애써 성과를 묻는다면 보편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고 있는 바와 나 자신이 도달한 성과의 간격이 너무 커 스스로 고립되기도 했고 “ET”, “외계인”, “별종”, “괴물” 등의 별명이 붙기도 했다. 그러한 별명도 성과의 일환 아니겠나 싶다.



5. 창금의 향후 대중화 등 발전가능성에 대하여 말해주시면?

사람들한테 많이 질문 받은 것 중 하나가 “왜 자기 자식한테만 가르치고 다른 제자를 두지 않았느냐?”는 것 이었다. 그런데 내 생각은 이렇다. 실제로 우리 아이가 내 밑에서 십 년이 넘게 온갖 고생하면서 힘들게 배웠는데 그 아이가 그렇게 갈고 닦은 장기로 전문예능대학을 못 간다.

아이가 고교시절 악기를 싸가지고 이대 황병기교수, 한예종 김해숙교수에게 찾아가 눈앞에서 연주하고 진학에 대한 협조를 받을 려고 하였으나 실패 하였다. 아무리 열 손가락으로 기막히게 연주를 할 수 있어도 받아주는 대학이 없다. 이걸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어떤 부모가 나에게 자식을 보내겠는가. 또 내가 그 점에 대해서 노력을 안 해본 게 아니다. 76년도부터 국악계 영향력 있는 관련자를 비롯 청와대에 진정을 넣고 많은 국악계 교수들에게도 ‘내가 제자를 키울 수 있게 길을 열어달라’고 부탁을 수없이 했지만 그런 노력들이 계속 제도권에서 가로 막혀왔다.

아직도 생생한 기억은 약 20여 년전 지금은 은퇴 했지만 현 예술원회원 권오성씨가 한양대 교수로 있으때 황병기(당시이대교수), 이재숙(당시서울대교수), 양연섭(한양대교수) 이 세사람의 추천서를 받아 온다면 강의를 할수 있게 힘써 본다고 하였으나 단 한명에게도 추천서를 받을 수 없었다,

또한 그후 수년동안 청와대에 진정을 넣었으나 결과를 얻지 못하였다.
(관련자료: http://blog.paran.com/hyc53/18317544 )

나의 연구 작업에 발전이라면 예로 국내 제1회 대한민국 UCC 대상뿐만 아니라 내 아이 연주 동영상이 얼마 전에는 일본에 알려져서 굉장히 화제가 되었던 동영상을 본 일이 있다. 일본사람들이 처음에는 한국사람 인정 안하다가도 결국에는 대단하다고 칭찬하더라.

가끔씩 취미로 배우고 싶다는 사람들도 있는데, 평생을 바쳐서 이 길을 걸어온 나로서는 나의 아이를 가르킨 경험에 비추어 단시간내 전수 할수 있는 일이 아니므로 짧은 시간에 배울수 있는 가벼운 교육이 아님을 밝혀둔다.

나의 아들이 아주 어릴 적부터 연마해 온 열손가락 주법은 다 자란 성인이 어떤 노력을 한다고 해도 그 경지에 이를 수 가 없다. 이미 손가락 근육이 굳어졌기 때문이다. 어떤 악기든 배울 수 있는 시기가 있는 것이다. 스무 살이 넘으면 십년 20년을 연습해도 테크닉이 완성될 수가 없다.

실제로 음악학원에 가면 어떤 악기는 6개월 완성 프로그램도 있다고 하는데 나는 그렇게 가르칠 수 있다고 장담 못하겠다. 요즘은 다 입시위주의 교육이라 가끔 부모들에게 연락이 와도 묻는 말이 “이거해서 어느 대학 갈 수 있느냐”다. 대입이 최우선이다. 이제 내가 죽고 내 아이가 이 길을 가지 않으면 이 기능은 살아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어디까지나 아들의 결정을 존중할 것이다. 내가 그동안 살면서 고생한 걸 다 보고 자랐으니 현실적인 선택을 하더라도 충분히 이해한다.


6. 그렇다면 이렇게 훌륭한 기능을 기존 국악계가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어디에 있다고 보시는지?

나를 인정함으로써 그들의 기득권이 위태로울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만약에 학생들이 내가 가르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하여 내 쪽으로 몰리면 기존의 선생들은 제자들을 잃게 되어 입지가 좁아진다. 그걸 염려하는 것이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영악해서 어느 쪽에 줄을 서야 출세를 하는지 벌써 다 안다고 하는 기사를 본 일이 있다.


7. 창작곡 ‘오솔길’이 무척 인상 깊었다. 기교적으로도 뛰어나고 멜로디도 아름다웠는데 작곡의 아이디어는 어디서 얻으셨는지?

우리 아이가 초등학교 때 학교수업 끝나면 집에서 또 가야금 교육을 받았어야 했었는데 아이가 힘들어 할 때, 내가 같이 여기저기 다니면서 친구처럼 많은 시간을 지냈다. 사실 나는 음악을 가르쳐 주고 싶은 거였는데 그 때 어린아이를 강제로 시킬 순 없으니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서 ‘어디 놀러가자’ 이런 식으로 꼬신 거였다. <오솔길>은 아이하고 같이 오솔길을 걸어가면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사실 내가 만든 악기라 가르쳐 주려해도 이 악기를 위한 곡이 따로 없어서 내가 직접 곡을 만들어야 했다. 오솔길도 열손가락으로 연주하는 곡인데 들어보면 양손이 대화하듯이 선율을 주거니 받거니 한다. 그게 바로 오솔길을 지나는 아이와 나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이 곡을 아이가 처음에는 한 개 악기로 연주하다가 차츰 줄 수를 늘려가면서 지금은 48현(23현+25현)으로 연주할 수 있게 훈련이 된 거다.


8. 연주하는 것 이외에 다른 생업을 가진 적은 없었나?

결혼하기 전까지는 계속 연주자 생활을 했다. 그 이후에 나는 쭉 집에 들어앉아 연구를 하고 아내가 생활전선에 뛰어들게 된 거다. 내가 처음에는 피아노 바이올린 같은 서양악기를 다룰 줄 알았기 때문에 서울대학교 음대 작곡과를 응시하여 시험을 봤는데 떨어졌다.

그 후에 미 8군에 스카웃이 되었다. 거기서 건반악기를 연주했다. 그러다가 당시에 인기가 많던 민요가수들을 위해서 오르간 옆에 가야금을 같이 놓고 연주를 했다. 무대에서 강한 조명을 받으며 연주를 하다 보니 가야금 줄이 열에 쉽게 늘어져 음정이 맞지 않는 등의 문제들이 드러났다. 그러니 현장에서 쓸모가 있는 악기를 만들기 위해 계속 고치고 고쳤는데 요새 사람들 그 작업을 보고 “개량”이라고 표현하더라.


9. 선생님의 호칭 중에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국악계에 권오성 교수라고 계셨다. 한양대학교 국악과에 있다가 지금은 은퇴한 분이다. 그 분이 초장기에 노량진 수산시장 언덕위 회집에서 술을 한 잔 하시더니 갑자기 “자네 혹시 외계인 아니냐?” 이러셨다. 느닷없이 그렇게 말 하시길래 나도 깜짝 놀랐는데 그 별명이 잊혀지지가 않더라. 그 다음에 ‘별종’이라는 별명은 아내가 나한테 붙여준 말이다. 또 최근에 인터넷에 어떤 사람이 나의 유튜브 동영상 연주들을 모아놓고 소개 글을 달아 놨는데 “이건 사람이 아니라 괴물”이라고 했더라. 아내에게 보여 주었더니 “맞는 말인데, 뭘!” 이러더라.


10. 서울에서 연주를 많이 한 곳은 어디인가?

인터넷이 보편화 된 시기 이전에는 내가 연주를 참 많이 다녔다. 말하자면 1974년도 당시에 명동에 가면 라이브 홀(극장식당)이라 불리던 큰 공연장들이 많았는데 그 많은 홀 중에 내가 연주를 안 한 곳이 없을 정도였다. 그 무대에서 전자올겐, 가야금을 연주 했었다. 내가 73년도부터 가야금 연주를 했으니 연주 경력은 삼, 사십년도 더 되었다. 내 라이브 홀 마지막 무대는 지금은 없어졌지만 명동 롯데호텔에 있는 스카이 프라자였다. 지금 내가 인터넷에 올려둔 곡들 - 김건모 등 당시 인기가요나 팝송 - 을 연주했는데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지 내가 무대에 서는 시간만 되면 사람들이 그 큰 홀에 가득 찼었다.


11. 유튜브에 선생님과 아들(천새빛)이 연주한 동영상이 많다. 언제부터 촬영으로 기록하게 되었고, 그 이유는?

2007년경 나의 아들이 국내 동영상 사이트에 자신의 연주영상을 올린 후에 수 많은 네티즌들이 여기저기 퍼다 날라서 유튜브를 비롯한 많은 사이트에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단 하나의 사이트에서도 수백만 건의 조회수와 많은 감동의 댓글을 본 일이 있었는데 어느 날 그 영상이 갑자기 삭제된 것을 볼 때 너무 허탈하고 아쉬웠다. 그런 일이 여러 번인데 이상하게 조회수가 많은 것들이 삭제가 되었다. 그래서 2010년 4월경부터 초기의 자료를 정리하여 유튜브에 직접 올리게 되었다.


12. 인터넷 활용과 연주공연은 요즈음에도 계속하고 하는지?

인터넷에 영상을 올려두는 유튜브(http://www.youtube.com)를 활용하여 자료를 올리고 있다. 인터넷은 ‘내가 현장에서 힘들게 무대에 올라가 연주하지 않아도 남들이 내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방법이 이렇게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들이 군 입대 하기 전에 그 간에 연주했던 레퍼토리들을 모두 동영상으로 정리해서 인터넷에 올려두기 시작한 것이다.

2007년 국내, 외 동영상 사이트에 퍼져있는 아들이 연주한 캐논 동영상을 보고 “스타킹”이라는 TV프로그램에서도 연락이 온 거였다. 조회 수가 한창 올라갈 때는 백 만 회 이상 올라가기도 했다. 아들이 군에 들어간 2008년부터 약 2 년 정도는 여기저기 연주를 다니지는 못했다. 연주는 아들하고 둘이 같이 다니곤 했으니까.


13. 현재 진행 중인 작업이 있다면?

천익창의 악기중 진품악기와 복원악기 오른쪽부터 비봉리현악기(6·~7천년전 한반도 현악기), 신석기 현악기, 철기시대 현악기, 오동나무가 악기로 선택된 시기 현악기, 신라시대 신라금, 일제시대 산조가야금, 일제후기 절금.



나는 이미 한반도 신석기 현악기, 비봉리 현악기(6~7천년전) 원시인류 뼈피리(약50~100만년전)를 복원하여 인터넷에 발표한 바 있다. 그것들을 연구하는 과정에 한반도에서 인류생성과정의 유물, 유적지가 흔적 없이 파괴되고 사라진 것을 보고 크게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가슴에 맺힌 형상들을 어떻게 재현 할 수 있을까 고심하다 도자기를 통해 재현하고자 현재 작업 중에 있으며, 이 역시 멀지 않은 시기 인터넷에 동영상으로 발표할 예정이다.


천익창의 악기중 세계각국에서 발굴된 뼈피리 학뼈, 독수리뼈, 사슴뼈, 각종 동물뼈와 조류뼈 복원(4천년전~1백만년전), 한반도 선사유물 복원(구석기, 신석기).



-끝-